한국일보

불상파괴와 권력놀음

2001-04-1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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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태(시인)

미지의 천당과 지옥을 말하기 전에, 종교란 사람들이 자나깨나 무겁게 짊어지고 다녔던 속세의 마음을 다 내려놓는 곳이고 또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기독교이던 불교이던 이슬람교이던 속세의 쓰린 마음을 내려놓고자 찾아드는 사람을 교리의 명목으로 가르려 하고 배척을 한다면 거기에는 종교의 편협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종교는 어떠한 사람이던 간에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서 쓰여지는 그 절대적인 성심의 감사함을 표적 삼아 상징한 것으로써 십자가도 있고 불상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혹은 불상 앞에서 마음을 다 내려놓고 천금보다 더 귀중한 종교의 말씀을 받아 챙기는 것이다.


사람이 찾아들어야 종교도 녹이 슬지 않는다. 예수님의 고통과 부활의 형상을 옮겨놓으면 십자가가 되고 득도하던 부처님의 형상을 옮겨놓으면 불상이 된다. 예수님의 말씀을 글로 옮겨놓으면 성경이 되고 부처님의 말씀을 글로 옮겨놓으면 불경이 되고 마호멧의 말씀을 글로 옮겨놓으면 율법이 된다. 이러한 것들은 종교적인 종교 차원을 떠나서는 인간사에 있어서 문화재가 되고 인간문화의 역사도 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들어간 자리에서 인간생활과 호흡을 같이 해 온 무속신앙이 파괴되고 이슬람교가 들어간 자리에서 인간생활과 호흡을 같이 해 온 불교신앙이 파괴된다면 거기에 따라 인간역사의 발자취인 문화재도 따라서 파괴된다. 세계는 지금 경악하며 문화유산의 하나인 바미얀 마애석불에 관한 한 하나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불상이 많아서인지 남의 일 같지 않은 깊은 우려와 관심이 간다. 테러국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탈리반 정권이 불교의 유적지로부터 모든 불상과 박물관을 파괴하려 든다. 정치를 위해서 종교를 이용한다. 본래 정치란 한 철의 권력놀음이라 철이 바뀌면 다른 새싹에 의하여 허무로 돌아가지만 종교는 인류에게 영원한 것이다. 무겁게 짊어지고 다니는 속세의 마음을 이곳이라야만 다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에 인류가 지켜내는 것이다.

한국 땅에도 불교가 국교였던 신라와 고려 때부터 만들어진 불상들이 많다. 더욱이 지형상 백두대간의 태백산맥이 거느린 높고 무거운 산들이 동쪽에 치우쳐 있어 우리나라의 지형이 일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하여 석불이며 석탑들을 서쪽 벌에 무수히 세워 그 무게로 우리나라 지형의 균형을 잡아야 했다는 것도 실상은 불교의 전교방법 중 하나였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문화재가 될 성싶은 그 작은 유물도 아무도 그 가치를 돌아 보아주지 않으니 언제부터인가 역마살이 낀 불상들이 어느 집 앞마당의 장식품으로, 아니면 어느 집 주춧돌용으로 아니면 화단의 장식용으로 옮겨다니는 신세가 된 것이다.

얼굴의 형태가 도저히 알아 볼 수 없을 만치 풍상에 깎기여 이제는 그저 둥근 몸체에 둥근 얼굴로 산야에 흩어져 있는 우리 불상들.

<목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내 여기 한 개 돌로 눈감고 앉았노니/ 천년을 차가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먼 솔바람/ 부풀으는 동해연잎/소요로운 까막까치의 우짖음과/ 뜻 없이 지새는 흰 달도 이마에 느끼노니/ 뉘 알랴!/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내 여기 한 개 돌로/ 적적히 눈감고 가부좌 하였노니> <유치환의 석굴암 대불>

그렇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는 저 작은 석불의 목에서도 목놓아 울고 싶은 통곡이 있을 것이다.
십자가가 모두 없어지고 불상이 모두 없어진다면 인류는 어디로 가서 무엇을 바라보고 무겁고 쓰린 마음을 내려놓아 보겠고 우리 이민자는 아디로 가서 무엇을 바라보고 납덩이같은 무거운 이민의 쓰린 마음을 내려놓아 보겠는가.

문화재란 거의가 종교가 만들어낸 인류의 역사이고 흔적이다. 인간이 발견해낸 절대자의 상이 종교이고 그 완전한 절대자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은 곧 인류의 이상적인 인간상의 구현인 것이다. 그것이 종교와 인간이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이상적인 조화의 미이고 관계인 것이다. 모순을 안고 문화재를 파괴하려는 그 앞에서 우리는 문화재의 가치를 더욱 소중하게 재해석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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