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역사 건망증

2001-04-10 (화)
크게 작게

▶ 이기영<뉴욕 지사 주필>

사람이 나이가 들어 중년을 넘어서면 갖가지 노화현상이 나타난다. 시력이 약해져서 눈이 침침해지고 몸에 살이 찌면서 동작이 둔해진다. 신체 각 기관의 기능이 떨어지면서 각종 성인병에 걸리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노화와 함께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은 건망증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에 기억력 하나는 좋다고 자랑하던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별 수가 없다.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주차해 놓은 장소를 찾지 못해 헤매거나 외출하면서 필요한 물건을 챙겨 나오지 않아서 낭패를 보는 경우가 허다해 진다. 심한 경우에는 약속한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려 큰 실수를 하거나 절친한 친구의 이름을 잊어버려 아연해 질 때가 노년에는 흔히 있다. 그래서 이런 건망증을 보완하려면 생각날 때 적어놓고 미리 챙겨놓는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기억력은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능력이다. 기억력이 없다면 자기의 집을 찾아가지도 못하고 가족을 알아보지도 못하게 된다. 그리고 집과 가족에 대하여 누가 설명해 준다고 해도 그 설명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사람은 기억력으로 지식을 축적할 수 있어서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반대로 기억력이 약한 동물은 많은 새끼를 낳아놓고 자기의 새끼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어떤 동물은 어느 새끼에게 젖을 먹였는지를 몰라 굶겨 죽이기도 한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습지에 사는 물오리는 악어의 공격으로 죽을 뻔한 사실을 금방 잊어버리고 악어에게 다가가서 잡혀 먹힌다고 한다.

이렇게 기억력이란 삶과 죽음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기능이다. 뇌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기억에는 눈의 잔상이 기억되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순간 기억이 있는가 하면 수분에서 수일간 계속되는 단기 기억과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남게되는 장기 기억이 있다. 이 순간기억 중에 특별하게 관심 있는 기억이 단기기억이 되고 단기기억 중에 더 관심 있는 기억이 장기기억이 된다. 자기 자신과 가족을 알아보는 것과 같은 장기기억은 사람 자체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건망증은 순간 기억이나 단기기억 뿐 아니라 장기기억의 일부까지 잃어버리거나 또는 기억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필요한 때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건망증은 그것만으로도 불편하고 낭패를 가져오지만 건망증이 심해져서 치매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치매환자가 되면 더 이상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폐인이 되고 만다.

그런데 건망증은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민족, 사회에도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집단적 건망증인 셈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사고도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지고 부실공사에 대한 관념도 흐려졌다. 외환위기 시절에 큰 고통을 겪었던 한국사람들이 1년 반만에 회복되었다고 허리끈을 푼 것이라든지 기고만장했던 문민정부가 어떻게 끝장났는가를 너무도 잘 보았던 국민정부가 또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것도 그 건망증 때문인 것 같다.

그라나 더 큰 문제는 이같은 단기기억의 건망증이 아니라 장기기억의 건망증인 역사 건망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노화현상으로 장기기역에 건망증이 생기는 것처럼 집단건망증이 있는 국가와 민족, 사회도 장기건망증이 있기 마련이다.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 아래서 당했던 고통을 지금 국민들이 뼈저리게 느낄 수는 없다. 그래서 그 건망증을 보완하기 위하여 “진주만을 기억하라”“상기하자 6.25”와 같이 역사적 교훈을 강조하는 말들을 한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경제의 바탕 위에서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합의로 출범한 나라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기억을 잃어 가는 역사건망증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이 건망증이 자칫 치매로 이어지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확 차려야만 하지 않을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