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전, 밤 비행기 안에서 처음 내려다 본 시카고의 밤 모습에 나는 반했었다.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난 길들을 따라 반짝이는 불빛, 무리 지어 있는 집들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 군데군데 섞여있는 까만 어둠...들은 알전구로 장식된 모형 마을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연출했다.
최근에 나는 그와 비슷한 지구촌의 밤 모습을 보게 되었다. 물론 직접 내다 본 것은 아니고, 시카고 트리뷴지에 난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서였다. 미 국방부에서 위성 기상관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찍었다는 그 사진은 퍽 인상적이다. 세계지도로 본을 떠 모형을 만들어 좁쌀 만한 알전구로 장식한 것 같이 귀엽고 앙증맞다. 대륙은 감청색으로, 바다는 먹물 빛으로 보여주는 이 사진의 포인트는 물론 불빛이다. 정밀한 렌즈와 최첨단 기술을 동원해 찍은 사진답게, 지구 곳곳의 불 밝힌 모습이 아주 정교하게 잘 나타나 있다.
불이 켜진 지역 중에서도 유난히 환한 곳을 보니, 미국 동부, 서부 유럽, 일본이다. 아프리카는 최남단과 북단을 제외하곤 칠흑 같은 암흑이다. 양미간을 좁히어 한반도를 들여다보니, 쌀 반 톨 만하게 보이는 남한은 전체가 환한데 반해, 북한은 불빛이 거의 없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먹물 색의 바다와 혼동되기 십상이다. 북반구와 남반구의 대조도 인상적이다. 환한 지역=잘 사는 곳=교육수준과 문화수준이 높은 곳. 전력은 곧 경제력, 나아가서는 국력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같은 사진을 보고, 미국에서 손꼽히게 큰 전력회사 엑셀론사의 회장인 죤 로우는 이런 따끔한 지적을 했다고 한다. "전력 소모가 많은 나라일수록, 그에 비례해 공해물질도 그만큼 많이 방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라고. 오랫동안 에너지 계통에서 일한 그다운 예리한 발언이다. 그에게는 환하게 밝은 뒷면의 어두움도 환히 보였나 보다.
그의 멘트를 염두에 두고 사진을 들여다보니 내 눈에도 새로운 게 보인다. 마치 해가 적당히 비치는 오후에 자연광으로 찍은 사진처럼 음양이 잘 드러나 있다. 북미는 남미에 그림자를 드리고 있고, 유럽은 아프리카에, 일본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 각각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누가 계획한 일도 아니건만 적당한 그늘이 드리워진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늘은 그늘을 만들지 못한다. 그늘은 드리워질 뿐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문명의 혜택들이 그늘의 매체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밝은 곳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걸 우쭐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너희들이 못사는 건 너희들이 게을러서라고, 폐쇄적이어서라고. 너희들 잘못이라고. 내가 알 바 아니라면서. 빛으로 인하여 그늘이 생긴다는 걸 기억한다면, 그늘을 어찌 네 잘못이라고 나무라고 무시할 수 있으랴.
그늘로 인하여 빛이 아름답다는 걸, 정호승 시인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한 그루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나무 그늘에 앉아/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지구촌의 그늘에 사는 이들을 그저 힘없고 못 사는 사람들로 무시해버리지 말고, 보듬어 안고 사랑하라고. 우리가 만들어낸 빛을 부와 힘의 상징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바꾸어보라고. 본래 우리에게 주어진 빛이 생명, 진리, 희망을 상징하듯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지구촌의 밤 모습은 22년 전 시카고의 밤 모습처럼 그저 아름답지만은 않다. 많은 얘기를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