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일본인의 역사의식

2001-04-1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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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 때 이런 재치문답이 유행을 탔었다. "앞으로 지구상에는 몇 명의 왕이 존재하게 될까" 그 정답은 다섯으로 돼 있었다. 트럼프 카드에 나오는 네 왕과 영국의 왕만 존속하고 나머지 왕들은 모두 없어진다는 이야기였다.

오늘날 그러나 지구상에는 적지 않은 나라에서 왕실이 유지되고 있다. 일본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일본 왕실이라는 존재는 아주 독특하다.
일본의 천황은 더 이상 신으로 떠받들여 지지는 않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여전히 외경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천황 개인은 물론이고 천황가에 대한 뉴스는 아직도 웬만한 경우 금기사항이다. 바람난 왕자, 공주의 사생활을 까발리는 영국과는 극히 대조적 현상이다. 이런 면에서 일본은 여전히 요지경의 나라다.

이같이 일본인들이 우상으로 섬기는 천황의 얼굴을 베끼는 책들이 최근 들어 잇달아 나왔다. ‘야마도 왕조’가 그중 하나다. 스털링 시그레이브 부부의 공동 저서로 천황과 황실은 일본 지배세력의 대리인으로 묘사됐다. 이른바 명치유신 후 천황은 개화세력의 대리인이었고 이후에는 군국주의자들의 대리인, 또 2차대전 후에는 일본의 재계와 이들과 결탁한 우파 정치인들의 대리인이었다는 해석이다.


일본 천황에 대한 또다른 책 ‘히로히토와 현대 일본의 형성’의 저자 허버트 빅스는 ‘히로히토는 태평양전쟁의 전범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의 주장은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만행, 즉 만주침략, 남경대학살, 대동아전쟁 그리고 진주만 기습 등에 히로히토가 직·간접으로 개입했다는 여러 사료를 통해 제기되고 있다.

빅스가 밝히고 있는 사실 중 특히 주목되는 부문은 천황의 멘탈리티다. 한마디로 정상인이 느끼는 그런 양심의 가책을 별로 못 느끼는 인물로 묘사돼 있다. ‘자신에게 그토록 충성을 바친 측근 신료를 배반하면서도 별다른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는 평가와 함께 ‘전쟁중 일본이 저지른 잔학행위에 대해서도 전혀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와 함께 이런 결론을 내린다. "천황이 과거 죄과를 한번도 인정한 적이 없으므로 이런 천황을 우상으로 모시고 있는 일본인들은 과거를 돌아볼 필요도 없다. 더구나 과거에 대한 반성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일본 교과서 파동이 재연되고 있다. 일부 우익 학자들의 비뚤어진 국수주의적 사관을 일본 정부가 동조하고 나선 게 이번 파동의 골자다. 이 일본의 우파 세력은 천황을 등에 없고 침략전쟁을 벌인 장본인들이다. 말하자면 우파와 일본 정부 합작의 요지경이 이번의 파동. 그 요지경이 그런데 이번에는 어쩐지 심상치 않아 보여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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