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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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 단가? 살아 남아야지”

2001-04-0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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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자의 세상읽기

▶ 권정희 <편집위원>

지난 주말 한국과 미국에서 두 여성이 화제가 되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일할 분야도 비슷한 김송자(61)씨와 전신애(58)씨가 그들이다. 김씨는 한국에서 노동부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이민1세인 전씨는 미국 노동부의 차관보급인 여성실장으로 지명을 받았다. 김씨는 한국 사상 첫 여성차관이라는 점에서, 전씨는 상원 인준을 거치면 부시행정부 최고위직 한인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두 여성‘개선장군’을 바라보는 언론이나 일반의 시각은 결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들이‘사상 최초’‘최고위’라는 결승선 테이프를 끊었기 때문에 뉴스가 된 것이니 이런 시각은 당연하다. 하지만 직장에 몸담고 있는 여성으로서 사회진출 여성 1세대라고 할수 있는 이들의 ‘개선’을 보는 느낌은 단순하지 않다. 결승선의 영광보다는, 뒤돌아보면 아득한 가시밭길이었을 마라톤 코스 구비구비의 과정이 먼저 가슴에 와닿는다.

미국에서 커리어를 쌓은 전씨에 비해 한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김씨는 특히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공직생활 30년은 그 자체가 성차별 투쟁사였다. 6급 공무원시험을 당당히 통과해 채용되었는데도 사무실에서는 7급의 남자 공무원 뒷전으로 밀려나야 했던 초년병 시절부터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그가 겪어내야 했던 성차별 일화는 숱하게 많다. 일개 개인사로 잊혀질 일들이 ‘일화’로 뉴스에도 오르내리는 것은 물론 그의 ‘개선’덕분이다. 결승선 테이프를 끊는 일은 그러므로 중요하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활발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여전히 뉴스가 될 만큼 흔치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에서 전체 노동인구중 여성은 46%로 거의 절반이지만 고위직으로 올라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500대 기업의 간부중 여성은 10명에 한명꼴이고, 500명 최고경영자중 여성은 4명에 불과하다(1999년 현재).

마라톤 출발선에서는 남녀 숫자가 비슷한데 결승선으로 갈수록 여성이 자취를 감추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제노동기구는 지난달 보고서에서 두가지 관행적 차별을 그 주된 이유로 지적했다. 여성의 간부승진을 은밀하게 차단하는 ‘유리천장’과 남녀의 직종· 업무를 교묘히 분리해서 여성이 하급부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붙잡아 매는 ‘찐득이 바닥’이 그것이다.

김송자씨와 전신애씨는 그 바닥과 천장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여성들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업무 능력만이 비결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씨는 ‘오기’, 전씨는‘뚝심’을 내세웠다. “직장에 들어가면 다인가? 살아남아야지”라며 후배여성들을 독려하는 김차관은 ‘성공하려면 전략가가 되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테니 적극적으로 자기를 선전하고, 전략을 세워 원하는 것을 쟁취하라는 충고다.

‘오기’‘뚝심’‘자기선전’‘쟁취’… 모두가 전통적 여성상과는 거리가 먼 단어들이다. 남성 영역의 말들이다. 이들 1세대 커리어 여성이 몸으로 부딪히며 체득한 것은 결국 직장은 ‘남성의 판’이라는 사실이다.

남녀의 근본적 차이를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은 ‘사냥하는 남자, 채집하는 여자’이론이다. 남성은 사냥하고, 여성은 나무열매를 따던 원시시대에 형성된 성별특성이 유전인자를 타고 현대인에까지 내려와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사냥꾼의 생리가 놀라운 집중력으로 표적을 찾고 누구보다 먼저 쫓아가 쟁취하는 것이라면 들판에서 나무열매를 따는 여성들은 이것저것 구경하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나누고 하는 것들이 즐거움이다.

여성의 사회진출은 나무열매 따는 정서로 사냥꾼 대열에 선것과 비슷하다. 본래 사냥꾼들의 텃세도 만만치 않지만 목표물을 향해 남보다 먼저 달리는 일이 아직 몸에 배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다. 여성은 직업의식이 약하다는 지적은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티백은 뜨거운 물에 담가야 진가가 나타난다. 엘리노어 루즈벨트 여사는 “여성은 티백과 같아서 뜨거운 물에 집어넣기 전에는 얼마나 강한지 알수가 없다”고 했다.‘여성 차관’이 더 이상 뉴스가 아닌 시대가 되려면 직장 혹은 사회라는 뜨거운 물에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여성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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