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녀를 강하게 키워라

2001-04-04 (수)
크게 작게

▶ 박이륙 (하와이)

근래 알게 된 분의 가족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가족이래야 60 넘어 보이는 남편과 서른이 넘어 보이는 아들이다. 한국에서 방문 온 그의 남편은 한국의 정세와 경제와 아이들 교육까지 다양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운 분위기였다. 특이한 것은 그녀가 남편에게 “여보, 이것은 잡수시고 저것은 잡수시지 말아요” 하면서 밥 위에 반찬을 얹어 놓아주는 것이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다정한 부부구나 하겠는데 또 아들에게 “얘, 이것은 먹지말고 이것 먹어, 왜 그것을 먹니?” 하면서 밥 위에다 반찬을 놓아주는 것이다. 혹시 사랑하는 부인이 애교로 한다면 받아 주겠는데 늙은 엄마가 나이 많은 아들에게 밥에다 반찬을 올려 놓아주는 모습이 어설프게 보였다.

그 집은 딸을 넷 낳고 뒤에 얻은 아들이 우상이 되어 생활 전체가 아들의 울음소리로 시작하여 아이가 잠드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방부제 섞인 것은 아이에게 해롭다고 음식은 밖에서 사다 먹지 않고 꼭 집에서 만들어서 먹이고 학교에 갈 때 올 때는 보호자를 두었고 밖에서 아이들과 같이 놀면 나쁜 말 배운다고 집에서 누나들하고 있게 하였다고 한다. 여름 방학이면 긴 방학동안 설악산 호텔을 빌려서 선생님 불러다가 공부시키면서 정말로 곱게 길렀다는 것이다.

듣다보니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은 80년대 후반 이민 붐을 타고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때 큰 나라에서 아이를 공부시킨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뉴욕으로 이민을 왔다. 어머니는 항상 아들 옆에만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서 한국에 6개월, 뉴욕에 6개월 있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은 지주이고 기둥인 엄마가 옆에 없으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랐다. 평소에 항상 엄마의 지시로 살아온 아들, 부족함이 없이 친구와 경쟁할 이유도 없고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와 누나가 앞가림을 해주었으니 다른 아이들과 같이 어울리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영어의 어려움으로 학업을 따라가기 힘들어 학교 가는 것도 빠졌으나 딸들은 엄마가 충격을 받을까 학교 잘 다닌다고 속이고 있었다고 한다.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을 못하고 자신 없는 미국 생활에 적응 못하니 매사에 자신이 없고 의욕도 없고 사람을 기피하게 됐다. 비디오 빌려다 보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된 아들이 차라리 나가서 싸움이라도 하였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무엇을 한다면 자금을 대주려고 하지만 하고싶은 것이 없다고 한다. 차라리 사업을 한다고 돈을 가져다 버리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고 하였다.

한국에서는 산아 제한 정책으로 하나나 둘만 낳아 기르면서 아이들은 왕자요, 공주가 되어가고 어머니들은 여러 아이에게 쏟을 정성을 한 아이에게 몰아줘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과 기대를 채우려 한다.

인기가 있다는 것을 다 가르치니 개성은 없어지고 손만 내밀면 부족함이 없이 채워 주니 아이들은 소중함이 없다고 한다. 유흥비를 벌기 위하여 여학생이 술집으로 간다는 소식도 있고 학교에서 분실물을 찾아가지 않는다고 하며 작아진 연필은 쓰지 않고 버린다고 한다.

소중함을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 조금만 벌을 서도 고소가 들어와 선생님이 설자리가 좁아진다고 한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에는 벌도 잘도 서고 손바닥도 많이 맞고 엎드려 기합도 받았어도 학부모가 선생님을 고소하는 것이 없었고 학생들도 선생님에게 반항하는 일이 없었다.

내 큰아들도 유약하여 대학 1학년 때에 일년동안 훈련시키기 위하여 홀로 서게 내버려 둔 적이 있다. 큰아들은 대학 1학년 때 이민 초기의 어려운 살림에도 하와이에서 동부 필라델피아까지 유학을 보냈는데 학교공부가 힘들다고 그만 두고 내게 전화하기를 하와이에 와서 1년 쉬었다 내년에 다른 학교를 들어가겠다고 했다. 전화 받고 앞이 캄캄하여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말을 했다.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을 때 내게 전화를 해라” 그러기 전에는 너를 안 보리라,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독한 마음먹고 나는 아들과 연락을 두절하였다. 얼마나 가슴이 쓰리고 아픈지 밥은 어디서 먹는지 잠은 어디서 자는지, 잠을 자다가도 그 생각을 하면 잠이 안 와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적이 많았다. 아들과 나는 서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홀로 서기였다. 아들은 돈을 쓸 줄만 알았지 어떻게 힘들게 벌게 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남이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야겠다고 생각했다. 1년 후에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얼마나 반가운지 목이 메어 말이 이어지지 안았다. 아들은 학교 입학하고 이번 학기부터 학교를 다닌다는 말이다. 그동안 교회 교인들이 쌀과 라면을 사줘 먹고살았고 교회에 일을 보아주어서 도움을 받고 생활을 하였다는 아들의 말을 들었다.

유약한 아들은 장성하여 의젓한 모습으로 하와이 집으로 찾아 왔다. 그 아들이 이제 사회에 일원이 되어 자기 몫을 해나가는 사람이 되었다. 아들은 교도소에 가서 간증하기를 그 때 어려움을 통하여 다시 태어났고 돈이 소중함을 알았고 인생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을 하였다고 간증했다.

우리 아이들 절반이 제대로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절반 이상이 부모님들이 이혼을 한 것을 보면서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이 땅에 살면서 겪을 어려움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물려 줄 유산이 무엇이겠는가를 생각을 하여 보았다. 자녀들을 위해서 미국에 왔다는 분들 가운데 자녀들을 마약에 빼앗긴 분을 보게 된다. 지금 한국서 조기 유학을 많이 하는데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양친 밑에서 사랑 받으면서 제대로 교육을 받아야지 아버지는 한국에, 어머니는 미국에 이산 가족이 된 상태에서 아이들만 있다가 탈선하는 것을 많이 본다.

내가 만난 그 분도 아이를 과잉 보호와 헛된 꿈을 아들에게 실현하려다 실패한 작품이 아닌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평생 농사라고 하였다. 매년 다시 짓는 농사야 올해 풍작이 아니라도 내년에 다시 지으면 되지만 자식 농사는 평생을 걸리는데 다시 물릴 수도 없으니 자녀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강하게 키워야 할 것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