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 정치인, 한국 정치인

2001-04-0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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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재상<수필가>

불과 5년 전만 해도 샌프란시스코 인접 도시 오클랜드에서 생업을 하는 동포들에게 소망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면 지긋지긋한 이 도시를 떠나는 것이요 그랬을 터이다. 오클랜드는 분명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사시절 쾌청한 날씨, 서부의 중요 관문, 빼어난 자연 환경이 무색하게도 우범과 마약과 빈곤이 암세포처럼 번지고 있었다.

20년 전 필자는 이 도시의 호숫가 근처에 식품점을 인수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가게를 시작한지 몇주 후 일요일 아침부터 별안간 손님들이 몰려들어 맥주가 바닥이 났다. 그 날은 이 도시의 우상 레이더스팀이 수퍼보울에 오른 날이었다.

그러나 도시가 매년 가난해지고 레이더스도 꼴찌를 맴돌더니 드디어는 로스앤젤레스로 팔려가고, 낙서와 휴지로 을씨년스런 브로드웨이는 해만 지면 인적이 끊겼다.


동포 가게 장사는 괜찮게 되었으나 좀도둑, 권총강도가 뻔질나, 숫제 총을 들고 장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수년 전 백인 할머니가 기웃거리며 가게에 들어섰다. 아니 여기가 수퍼마켓이었는데 아직도 남아 있네. 그랬다. 30년 전만 해도 호숫가는 잠자는 평화로운 주택지였다고 한다. 본래의 오클랜드는 부유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이승만, 안창호 선생이 머문 곳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이 제일 먼저 설립된 곳도 오클랜드다.

대학은 버클리로 이사했지만 UC주립 대학들을 관장하는 사무실은 아직도 호수 건너 카이저 빌딩 안에 있다.

도시가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주의회 법사위원장이던 앨리후 해리스가 90년 중반 시장에 재임되면서부터였다. 그는 그때까지 시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시 매니저의 권한을 대폭 이양 받아 실질적인 시장이 되었다.
그가 시장에 입후보했을 때 몇몇 한인들이 모금집회를 했는데, 그는 그 때까지도 한인들이 밀집한 거리를 지나면서 그들이 모두 중국인인줄 알았다고 했다.

해리스가 기초를 다졌다면 도시가 본격적으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제리 브라운 시장부터이다. 그의 아버지도 그도 캘리포니아 주지사였으며 그는 흑인 다수의 도시에서 6명의 흑인 후보를 물리치고 시민들의 절대 지지를 얻어냈다.

그는 우선 범죄도시라는 오명을 벗기기 위해 경찰력을 증가시키고 치안 강화 정책을 지켜나갔다. 뉴욕타임스의 도시별 범죄 조사를 보면 오클랜드는 작년보다 4,886건의 범죄가 줄어들었다. 그는 인구 유입을 위해 쾌적한 도시로 변모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항구 초입 허름한 건물에서 혼자 산다. 새벽이면 부두 인근의 텅텅 비어 있는 건물, 폐쇄된 건물 사이로 조깅하는 그를 볼 수가 있다. 드디어 이 지역의 건물들이 헐리기도 하고 새로 단장되기도 한다. 고급 타운 하우스가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벌써 입주권이 매진된다고 했다.

이제 오클랜드에서 빈 아파트 방 구하기도 힘들어 지고 집 값도 렌트도 전국에서 세번째로 많이 올라버렸다. 그 바람에 서민 중에는 제리 브라운에게 속았다고 데모를 하는 사람들도 한다. 그러나 그는 도시 개발을 멈추지 않는다.


가게 건너편 17년 전 땅만 깊게 파놓고 파산해버린 자리에 지난해부터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팔려갔던 레이더스 풋볼 도 돌아와 올해는 4강에까지 올랐다. 경기가 있는 날, 콜러시엄에는 시커먼 레이더스 깃발이 파킹장을 메우고 있다.

올해부터는 샌프란시스코의 각종 한인 업소들이 오클랜드로 이전 텔레그라프 거리에 한인타운이 형성된다. 타운 형성을 적극 권장하는 브라운 시장은 한국 식품점 개점, 한인 은행 지점 개설, 지난달 27일 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 지사가 오클랜드로 이전한 기념식 날도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지금도 독신으로 살고 있는 그는 마른 체격에 수도자처럼 검정 옷을 즐겨 입는다.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가 없느냐고 물으면, 시장에 재출마 하여 시민들이 밤에도 브로드웨이를 활개치고 걷게 만들고 싶다고 한다. 이 글이 모국의 대권에만 집착한 정치인들에게 읽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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