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통령의 건강

2001-04-0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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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모<언론인>

최근 김대중 대통령은 눈병을 앓았다. 청와대측 발표에 따르면 "결막하출혈"이라는, 좀 생소한 병명이다. 과다한 업무로 인한 피로 때문에 생긴 가벼운 징후로써 특별한 처방 없이 휴식을 하면 낳는 눈병이라는 것이다.

김대통령 자신도 ‘국민과의 대화’ 라는 TV프로에 나와 "오른쪽 눈의 모세관이 터져 눈이 거북하다"며 "(보기에) 안됐더라도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얼마 안 있어 정상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건강상에 별다른 변화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3월26일 개각에 즈음하여 신임 장관들에게 당부 말을 하는 모습이 잠시 TV 화면에 잡혔을 때, 대통령의 오른 쪽 눈은 아직도 불편해 보였다. 눈병의 후유증이 꾀나 오래 가는 듯 했다.


대통령의 건강은 늘 국민들의 관심사다. 국가 지도자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한 상태여야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같은 선진국의 경우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매우 철저하다. 재직중 총격을 당해 미국과 세계를 놀라게 하고, 그 뒤 폴립 수술까지 받았던 레이건의 예가 대표적이다. 최근엔 체니 부통령의 심장병을 놓고도 미국 언론들은 부시 대통령의 유고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제기하는데 가차가 없었다.

이에 비해 우리는 국가 지도자의 건강상태를 철저히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결코 무관심해서가 아니다. 관심은 어느 나라 국민 못지 않다. 그러나 대통령의 건강문제는 일종의 ‘언터처블’(건드려서는 안될 금기사항)이다. 뭐라고 한마디했다가는 ‘불경죄’에 라도 걸릴 것처럼 인식돼 있다. 이 나라의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민주화가 됐다는 요즘에도 대통령의 건강문제를 제기하는 언론은 없다.

이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그 옛날 왕조 시대야 그렇다 치고 건국 이후 헌정사에서도 그런 잘못은 계속 답습돼 왔다.

걸음걸이마저 불편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노망기’를 언론이, 국민들이 문제삼고 나섰다면 그 자신의 참담한 정치 종말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말년의 건강상태는 좋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고독하고 은밀한 밤의 향락에 함몰된 그의 건강지수는 병리심리학적으로 정상을 일탈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벙긋하지 못했다. ‘지존’(至尊)에 대한 불경, 그것은 곧 엄청난 대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래도 세상 물리가 많이 깬 셈이다. 대통령의 건강문제를 제기한다 해서 치도곤을 맞지는 않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성역’을 피해가려는 타성 때문이다.

이젠 그런 타성을 깰 때가 됐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건강상태를 알 권리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머지않아 8순이다. 본인 말대로 타고난 건강 체질이라 하지만 3년전 취임 할 때보다는 많이 피곤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집권 이후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면 무리가 아니다. IMF 사태와 경제난, 구조조정 등 각종 개혁문제, 평양 방문, 야당과의 힘겨운 정치 공방---짐작컨대 김 대통령의 심신은 매우 피곤해 있을 게 분명하다.

우선 목소리의 볼륨이 현저히 낮아졌다. 목소리는 기력과 통한다고들 한다. 체중을 줄여서인지 얼굴 모습도 약간은 수척해 보인다. 물론 그 연배에 머리숱이 풍성한 것을 보면 건강미가 아직도 엿보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의 소망을 갖고 있다. 김 대통령이 야당 시절 검소한 점퍼 차림으로 시장 구석구석을 훑으며 서민들과 대화하고 웃고 격려하던, 기력 넘친 모습---자연의 나이테를 깎아낼 수야 없지만, 그러나 인생의 깊이가 녹아나는 노익장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싶다.

캠프데이비드에서 미-영 정상회담을 마치고 노타이 차림으로 기자들 앞에 나와 싱싱한 젊음을 과시한 부시와 블레어의 다이내믹(역동성)을 보면서 더욱 그런 소망을 품어 본다.

8순의 지도자를 떠받들어야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운명이다. 2003년 2월24일, 청와대를 떠나 한 시민으로 돌아 갈 DJ의 건강한 모습에 모든 국민들의 환호와 박수가 물결치길 바랄 뿐이다. 그가 재임 중 건강해야 나라도 평안할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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