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줌마의 친한 친구

2001-03-3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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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수첩

▶ 하은선<특집부>

"마음을 털어놓는 친구가 몇 명이세요?"

가정을 안고 사회 속으로 뛰는 LA 아줌마를 취재하다가 불쑥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던 아줌마들은 옆자리에 앉은 직장동료나 주일마다 만나는 교우를 꼽으며 "2-3명"이라고 대답했다. 그 중 의외의 대답은 제니퍼 김씨의 ‘우리 딸’.

고교 2학년생 딸을 둔 김씨가 밝힌 이유인즉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하염없이 하소연을 들어주고 고민을 나누기란 마음 같지 않다. 하물며 시간을 내서 식사를 함께 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렇다고 전화통을 붙들고 가족들의 눈치를 보면서 이러쿵 저러쿵 떠들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런 면에서 같은 여자인 딸과 친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님도 엄마를 친한 친구로 생각할까요?" "물론이죠.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같이 생활하니까. 아마 딸이랑 가장 친하다는 엄마들이 꽤 있을거에요"라고 말하는 김씨는 당연히 그렇다는 표정이다.

최근 짝짓기 프로그램 개발회사가 ‘당신이 아무 거리낌없이 밤 12시 넘어 전화해서 어떤 일을 의논할 수 있는 친구가 몇 명인가?’라는 설문지를 돌렸다. 설문대상은 10대부터 40대까지. 설문지상의 보기는 1)1명 2)2-3명 3)4-5명 4)그 이상.

회수된 설문 답안지 중 10대와 20대 초반의 신세대들이 적은 숫자는 1명이나 2-3명이 아니었다. 57명, 73명, 81명 등 예상을 초월한 구체적인 대답이었다. 덧붙인 설명은 휴대폰에 저장돼있는 친구들의 숫자라는 것. 휴대폰은 비록 한밤중이더라도 언제 어디서든지 연락될 수 있어서 그 많은 친구들이 모두 가까운 사이라고 밝히는데 거리낌이 없다나.

어느새 몇 년간 정성 들여 기록해왔던 전화번호수첩을 뒤적여 친구에게 전화를 하기보다 휴대폰에 입력된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횟수가 많아졌다.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받아 적던 습관도 휴대폰에 입력하기로 바뀌었고 한번이라도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온 친구는 수신번호와 함께 이름이 입력되는 영광(?)을 얻게 됐다.

이민 생활을 하면서 세대차이, 문화차이를 극복하기도 힘든데 모녀관계를 가장 가까운 친구사이로 단정지음은 무엇보다 반갑다. 요즈음 자녀들은 어머니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면서 경제력과 유머, 센스, 세련된 외모 등 현대적 감각을 갖춘 사람이기를 기대한다고 하던데. 딸의 휴대폰에 엄마 전화번호가 입력돼있는지 찾아보는게 엄마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여길거라 짐작하는 LA아줌마들에게 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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