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한 친지의 가정에 비상이 걸렸다. 동부의 대학에 입학한 딸이 독감에 걸려서 며칠씩 학교도 못가고 앓아 누웠기 때문이었다. “객지 생활하면서 몸까지 아프니 얼마나 힘들까”친지 부부는 가슴이 아팠다. 딸이 소리도 제대로 안나오는 잠긴 목소리로 “설렁탕이 먹고 싶다”는 전화를 하자 LA의 아빠는 안절부절을 못했다.
생각다 못한 그는 아이 학교근처의 한국식당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주인에게 “대가는 원하는 대로 지불할테니 설렁탕 한그릇만 학교안 기숙사로 배달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식당 주인의 대답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데다 우리 집은 원래 배달을 안하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더군요. 며칠씩 아무 것도 못먹고 누어있을 아이를 생각해보세요. 그때 식당주인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딸 걱정하는 아빠의 부탁이 너무 간절해서 거절할 수가 없다며 배달을 해주겠다는 것이었어요”
멀리 떨어진 학교에 보내니 아이 아플 때가 제일 큰 문제더라고 친지는 말했다.
12학년 학생과 부모들이 우체통에 온통 신경을 집중시키는 계절이다. 3월부터 4월 초순은 전국의 대학들이 합격 통지서를 발송하는 기간이다. 합격을 알리는 두툼한 봉투, 불합격의 얄팍한 봉투가 지원서 제출한 숫자만큼 쌓이고 나면 그 다음은 진학할 대학을 결정하는 순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부모와 자녀간에 갈등이 노출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집에서 뚝 떨어져 훨훨 날아가고 싶은 자녀와 되도록 곁에 두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마찰을 빚는다. 대학생될 꿈에 부푼 학생들은 말한다.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요”“이제 내 삶은 나 스스로 개척하고 싶어요”
반면 자식을 내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이다. “자유분방한 캠퍼스에서 마약에 손대지 않을까, 술을 너무 마시지 않을까, 여자아이(남자아이)랑 사고나 치지 않을까…”가 일차적인 걱정이라면, 그 다음 걱정은 “미국 아이들과만 어울리다보면 너무 미국화돼서 아이를 영영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하는 것이다.
자녀를 어느 지역의 대학으로 보낼까 결정하면서 부모가 고려해야 할 것은 자녀와의 관계라고 생각된다. 제대로 반듯하게 자란 아이라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다고 해서 행실이 나빠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경험있는 부모들의 말이다. 처음 자유를 맛볼 때의 치기가 잠시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학교가 가까운 데 있어서 거의 매주 집에 오는 경우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일년에 서너번 얼굴을 대하는 경우는 아이와 부모의 친밀도에 상당한 차이를 만든다. 밸리의 한 주부는 맏아들은 집에서 한시간 거리에, 막내아들은 멀리 동부로 대학을 보냈는데 그리고 나서 10여년 지나니 차이를 느낄 수가 있다고 한다.
“가까이서 늘 오가며 지내던 맏이는 요즘도 수시로 전화를 해서 부모 안부를 챙겨요. 동부에서 대학, 의과대학 거치며 계속 살고 있는 막내는 그런 게 없어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는 게 몸에 배다보니 부모에 대한 애틋한 정도 덜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물론 있다. 전화, E-메일로 매일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집에서 살때보다 자녀와 오히려 더 깊은 대화를 나눌수 있게 되었다는 부모도 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크게 두단계로 구분된다. 제1기는 부모가 자녀를 일방적으로 돌보고 자녀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단계, 즉 자녀가 미성년일 때다. 제2기는 자녀가 성년이 되어 독립해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단계로 부모와 자녀는 서로 의지도 하고 돌보기도 하며 동반자적 관계를 갖는다.
자녀가 처음 집을 떠나 대학생활을 하는 때는 제1기와 제2기의 과도기적 기간이다. 상당 부분 독립했으면서도 재정적, 심리적으로 여전히 부모에 대한 의존심이 남아있는 재미있는 시기이다. 그래서 고등학교때 한집에 살면서 마찰 많던 자녀와 부모가 이때 많이 좋은 관계를 회복한다. 제2기에 나와 아이의 사이는 어떨지, 자녀가 진학할 대학을 정하면서 앞으로 평생 이어질 성인으로서 자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