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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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예수 믿으세요"

2001-03-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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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에세이

▶ 정숙희 <특집부장>

한국 불교계에서 ‘뜨고 있는’ 미국인 현각스님이 지난 일요일 LA에서 두 번째 법회를 가졌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인파가 몰렸고 그중에는 기독교인도 상당수 됐다. 현각스님은 설법중 이런 말을 했다.

얼마전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어떤 사람이 악을 쓰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그말을 들어보니 "오직 믿으라"는 것이었다. 그는 스님의 바로 앞에까지 와서 외치다가 스님을 향해 왜 안 믿느냐고 소리쳤다. 스님은 "너 때문에"라고 대답했다고 말해 청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현각스님은 베스트셀러인 그의 책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토로하고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만나는 기독교신자들은 스님에게 다가와 "평생 씻을수 없는 죄를 짓고 있으며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고 심지어 ‘악마의 말을 전하는 사탄’이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단전호흡을 하며 편안한 마음을 가지려고 애쓴다는 현각스님은 평균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이런 일을 겪고 있으며 한국에 있는 외국인 스님들 모두가 겪는 일이라고 했다.


유감스런 것은 한국인 스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외국인 스님에게만 자행되고 있다는 비겁한 사실이다. 만일 지하철을 탄 한국인 스님에게 이런 식으로 전도했다고 해보자. 스님 당사자도 그렇지만 주위 사람들도 가만 있지 않고 한마디씩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인 스님에게의 이런 무례는 왜 용납되는 것일까? 짐작컨대 한국말을 잘 못하는, 머리깎고 승복입은 별난 모습의 외국인이, 과연 이 위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집단적인 호기심이 이처럼 끔찍한 상황을 숨죽여 구경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런 일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두달전 LA의 종매스님이 마켓앞에서 비슷한 일을 겪고 우리 신문에 투고해 여러 사람이 혀를 찼던 기억이 있다. 그는 전도인에게 자신의 복장을 가리키며 정중히 합장까지 했으나 그는 끝까지 마켓문을 막아서면서 "회개하고 구원받으라"고 떠들었다는 것이다. 이건 상식과 매너, 그리고 인격에 속하는 일이다. 한 종교에 평생을 헌신한 승려에게 그런 식으로 다른 종교를 전도한다는 것은 당위성을 떠난 방법 차원에 있어서라도 그 사람의 삶과 인격 자체를 모독하고 부인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후 실렸던 한 가톨릭신자의 글은 더 황당스럽다. 성당에 다닌다고 하자 "이 마귀야 똑바로 믿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니, 두사람중 누가 더 마귀처럼 보이는가.

남가주에 산재한 한국마켓들 앞에서는 불교신자, 천주교신자, 기독교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이처럼 극성스런, 때로 광적인 전도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교회에 나가느냐, 언제 구원 받았느냐,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확신이 있느냐등 기습적인 질문에 일단 붙잡히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조차 쉽게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전도의 불쾌함을 경험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말이 있다. "전도하되 성숙하게 하라"는 것이다. 타인의 입장을 전혀 헤아리지 않는 막무가내식 전도는 너무 원시적이어서 믿어보려던 사람에게마저 혐오감을 준다는 사실을 ‘전도전문가’들은 이제 그만 깨달았으면 좋겠다. ‘전도폭발’을 수료하고 성경구절과 예상질문, 답변을 달달 외운 후 노방전도와 심방전도의 실습을 거쳐 전도하던 시대는 지났다.

교회들은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든가, "하늘나라에 가면 전도한 사람의 상급이 제일 많다"는 확인 불가능한 이야기로 전도의무를 독려하고, 전도왕 뽑아 상주기, 총동원 전도주일등의 프로그램을 도입해 교인들로 하여금 결국 다른 교회 교인들을 ‘빌려’오도록 만들고 있는데 그보다는 ‘교인’들을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신경쓰는 것이 전도에 더 빠를 것이다.


크리스찬이 전도를 위해 우선 해야 하는 일은 진실한 크리스찬이 되는 일이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한다면 그가 믿는 종교도 존중할 수 있는 용기도 신앙의 한 부분이다.

테레사수녀의 위대한 점은 ‘죽음을 기다리는 집’에서 빈민들의 임종을 도울 때 힌두교인이나 회교도인 환자들에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각자의 종교로 기도하면서 평안히 죽음을 맞도록 했다.

개신교가 타종교에 대해 철저하게 배타적인 이유는 구약 십계명의 "너는 나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첫계명과 신약에서 "예수 이름외에는 천하 어떤 것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성경구절에 기인한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점령하며 살육을 서슴지 않았던 데 반해 신약시대 예수는 사랑과 자기 희생으로 세상을 정복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인간으로 치지도 않았던 이방인, 문둥병자, 여자, 어린이, 창기, 세리등을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안았던 예수는 바로 그 낮고 천한 사람들을 제자 삼아 복음전파자로 만들었다.

예수의 사랑과 희생은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인간으로서 기본적 예의는 지키는 것이 전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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