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담배 피우는 여자

2001-03-30 (금)
크게 작게

▶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한국 비디오를 보다보면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다. 수십년전 이민온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의아한 것들이 종종 있는데 그중 하나가 TV에 비친 여성들의 모습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한국 비디오를 보면 여성들이 술을 참 많이 마셔요. 가정주부들도 화나는 일 있으면 거리낌없이 술을 마시던데 한국여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많이 마실까요?”

“전에는 TV 드라마에 담배 피우는 여자가 등장하면 개방적인 신세대 아니면 술집 여자들이었지요. 이제는 평범한 50대 가정주부들이 담배 피우는 모습이 드라마에 자연스럽게 나와요. 실제로 여성들 담배 피우는 것이 그렇게 보편화한 걸까요?”


한국사회는 해가 다르게 변하는 데 미주 한인들의 머릿속에는 수십년전 이민올때의 한국 모습이 각인되어 있으니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 발생하는 것이다. TV나 영화가 특정 사실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여성의 음주나 흡연에 대한 인식이 한국에서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80년대만 해도 다방에서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면 업주가 노골적으로 구박(?)을 해서 여성 언론인이 이를 칼럼으로 쓰기도 했다.

지금은‘담배 피우는 아줌마’라는 책이 나올 만큼 분위기가 바뀌었다. 여성신문사의 인터넷 잡지 ‘아줌마’의 편집장인 이숙경씨가 쓴 페미니즘 에세이집이다. 여자라고 해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주눅들어 살 것이 아니라 자기 뜻에 따라 살 것을 권장하는 내용이다. 물론 저자가 몸에 해로운 ‘담배’를 권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똑같은 담배를 두고도 남자는 괜찮고, 여자는 안된다는 식의 이중잣대를 허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담배’가 전통적 여성관에 저항하는 상징물로 부각되었는데 알고 보면 오래 전부터 이를 부추긴 것이 담배회사들이다. 담배 피우는 여성은 ‘독립심 강하고 매력적이며 세련된 현대 여성’이란 이미지를 심기 위해 담배회사들은 수십년전부터 엄청난 광고비를 쏟아붓고 있다. 여권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 버지니아 슬림스가 여성해방에 빗대어 내건 ‘참 먼길을 왔구나’(You’ve come a long way, baby)류가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해방’의 상징인 담배가 여성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으니 문제다. 연방 공중보건국이 지난 27일 발표한 ‘여성 흡연’ 보고서에 의하면 특히 젊은 층 흡연이 늘어 청소년의 경우 여성 흡연인구가 이제 남성과 맞먹는다. 흡연으로 인한 사망은 계속 늘고 있는데 여성들은 그 위험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암은 유방암이지만 미국에서 유방암으로 죽는 여성은 폐암으로 죽는 여성 보다 40%가 적다.

여성이 담배를 피우면 수명이 평균 14년 단축된다고 한다. 흡연을 둘러싼 성차별은 문제이지만 그것이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부각되는 일은 이제 재고해야 하겠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