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살이에는 ‘때’가 있다

2001-03-2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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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동<위장내과 의사>

가난한 농사꾼의 큰아들로 태어난 19세의 소년 ‘정주영’이 온 집안의 생명줄인 소 판 돈을 몰래 갖고 무작정 상경했다.

“어머니! 조선 제일의 갑부가 되어 꼭 돌아올께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가난이 싫어 고향을 등진 것이다. 먼 훗날 그는 약속대로 조선 제일의 갑부가 되어, 훔친 소 값의 1천배가 넘는 1,000여마리의 방울소를 손수 몰고 한많은 반세기 민족 분단의 철책을 넘어 금의환향했다. 분명 그는 6.25동란을 겪은 배고팠던 민족사의 살아있는 증인이었다.

그가 겪었던 배고픔의 서러움을 우리 모두가 겪었었기에, 그는 항상 우리 모두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나이 들어 온 얼굴과 목 언저리에 주름살과 검버섯이 피었어도 그는 우리에게는 자랑이었다. 그리고 그는 비록 별로 배운 것이 없었지만 자기 밑에 수천 수만명의 대학 졸업자와 기라성 같은 박사들을 거느렸던 전설 속의 히어로였다.


그런 그가 ‘때’가 되어, 마침내 피땀이 온몸에 밴 고달픈 육신을 땅에 묻고 3월21일 이 세상을 떠났다. 때가 되니, 결국 기업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간 거목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역시 빈손으로 무대 위를 떠난 그 분의 모습은, 천년만년 영원히 살 것만 같은 인간의 허상을 거침없이 깨뜨려 버린다. 허전한 느낌이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또 하나의 드라마다.

세상만사에는 모두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찾아온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더운 여름이 있으면 추운 겨울이 있다. 건강할 때가 있으면 반드시 아플 때가 생기고, 젊을 때가 있으면 결국 언젠가는 늙게 마련이다. 그래서들 세월을 아껴 일할 수 있을 때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했던가보다.

그러니 지혜로운 자는 세월을 아껴야 한다. 웬만한 모든 것은 돈으로 살 수 있으나, 흘러가 버린 세월만은 그 누구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한국 제일의 갑부가 왜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놔두고 빈손으로 갔으랴.

한국 경제의 한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 굴지의 기업군을 창설했고, 역경을 땀으로 극복하면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현대정신’을 창조해 냈다. 그가 말한 기업정신은 철두철미 행동과 땀으로 세월을 아끼는 삶이었다.

세월을 아끼며 살았던 그에게는 그래서 수많은 기회들이 찾아주었다. 쌀가게에서 돈을 벌어 현대자동차의 모태가 된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 서비스’를 차린 것이 큰 기회였다. 해방이 그랬었고, 6.25전쟁조차 그에게는 도약의 기회로 찾아왔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공사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공사들이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시켜 주었다. 말년에, 내 평생 마지막 사업은 ‘대북사업’이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하면서, 소 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나들던 그 분의 휴머니티가 그립다. 그 분은 갔지만, 그 분의 소박하고 성실했던 인생 삶은 세월을 아끼며 근면하게 살라는 인생의 교훈과 함께 우리 모두의 가슴 안에 길이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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