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갈 길 먼 외환은행

2001-03-2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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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코노미스트

▶ 민경훈<편집위원>

가주 주도는 새크라멘토다. 인구 100만으로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가주 중심 도시인 LA나 샌프란스시코에 비하면 시골 동네 같은 느낌을 준다. 뉴욕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의 수도인 뉴욕이 아니라 올바니라는 소도시가 주도다. 최근 지진이 난 워싱턴도 주도는 시애틀이 아니라 올림피아란 곳이며 일리노이도 시카고가 아니라 스프링필드가 주도다. 텍사스는 휴스턴이나 댈라스가 아니라 오스틴, 펜실베니아도 피츠버그나 필라델피아가 아니라 해리스버그가 주도다.

미국 50개주 가운데 이름이 잘 알려진 대도시는 일단 주도가 아니라고 봐도 큰 잘못은 없다. 이처럼 주도와 주요 상업도시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닐까. 정답은 아니다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가급적 행정 중심지와 금융 중심지를 떼어놓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권력을 쥔 정치인들과 돈을 가진 금융가들이 한데 모여 있으면 서로 결탁해 정실에 치우친 행정과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특혜 금융을 하기 쉽다는 우려에서였다.

미국의 중앙은행 격인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가 전세계에서 독립성이 가장 강한 은행의 하나인 것도 이같은 정신을 이어받은 탓이다. 의장을 대통령이 지명하기는 하지만 금리를 올리고 내리는 일이나 통화량을 늘리고 줄일 때 전혀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유럽에서도 독일 중앙은행 정도가 그 정도의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는데 그 까닭은 제2차 대전에서 패한 후 미국식 모델을 따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인 유형이 한국과 일본등 아시아적 중앙은행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은행인들이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형식적으로는 금융 개혁을 한다고 떠들고 있지만 실상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정부가 은행의 주인으로 은행장 인사를 비롯한 주요 결정을 독점하고 있다. 권력자의 비호를 받지 않고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하고 올라가더라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권력의 줄을 잡기 위해 발버둥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를 하는 나라는 다 그렇지만 특히 한국에서 은행장의 파워는 막강하다. 평균 1만명에 가까운 직원들에 대한 인사권을 쥐고 있을 뿐 아니라 빚이 자기자본의 몇 백에서 몇 천 %에 달하는 한국 기업들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생사여탈권이 은행장 손안에 들어 있다. 잘 보이면 어려울 때 몇 백억 정도 쉽게 얻어 쓸 수 있고 밉보이면 아무래 장래가 밝아도 당장 부도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기업인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은행장의 환심을 사려 애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잘 보인다’의 의미는 눈웃음을 잘 친다는 것이 아님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구조적으로 썩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스템이다. 이런 줄은 다 알지만 아무도 이를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정치인들은 정치인들대로 필요할 때 정치자금을 손쉽게 마련할 수 있고 행장들은 장들대로 윗분 말만 잘 들으면 자리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단 직원도 마찬가지다. 자유경쟁 체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돼 실적에 따른 인사고과가 이뤄질 경우 피곤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효율적인 경영을 이유로 은행간 인수합병이 이뤄질 경우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국민들은 금융개혁을 공약으로 내건 정치인을 찍기보다는 그 사람 고향이 어디인지를 먼저 따지는 게 당연시되고 있다.

최근 LA 퍼시픽 유니언 은행의 박광순 행장이 임기 3년을 채우지 못한 채 전격 교체됐다. 박행장은 2년전 부임한 이래 은행 이름을 바꾸고 증시상장을 위해 미 전역을 뛰어 다니며 투자가를 모집하는등 역대 행장중 가장 많이 일한 사람의 하나다. 순익도 1,000만 달러가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신상의 이유’로 사표를 받은 것은 아직도 한국 외환은행의 인사가 능력이나 업적이 아니라 그 외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과거 가주 외환은행이 한국 외환은행의 지사였을 때는 이같은 인사가 통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퍼시픽 유니언은 엄연한 미국내 상장기업이다. ‘독립적인 경영을 하는 회사로 만들겠다’며 투자가들을 끌어 모은 후 정실인사를 일삼는다면 이는 투자가들의 신뢰를 배신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제대로 영업을 하고 있는 타운 한인은행들까지 나쁜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된다.

한국의 관금 유착은 한국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 하루 빨리 척결해야 할 과제다. 외환은행은 미국에 와서까지 한국의 악습을 퍼뜨리는 일을 삼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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