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심청이와 심봉사

2001-03-2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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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경자<시인>

어느 날 심청전 판소리를 듣는다. 차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도록 볼륨을 올려 둔다.
늘 차에 싣고 다니던 오디오 테입이 어느 날 이렇게 내 기분을 움직이고 싶어 한다. 아니 나는 스스로 변화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 심청전의 독후감을 쓰면서 의문이 하나 있었다. “왜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 죽은 즉시 심봉사의 눈이 번쩍 뜨이게 되지 않았을까?” 심청이의 목숨 값이요, 조건부 공양미 삼백석의 시주를 바쳤건만 여전히 심봉사는 맹인이요, 가난뱅이 홀아비로 천덕꾸러기의 삶을 계속하게 되나 말이다. 오늘 아침에 심청전의 ‘심봉사가 눈뜨는 장면’ 들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요즘 세상에 부모에 대한 효성으로 목숨을 버리는 자식들이야 물론 없겠지만 이런 문화적 배경을 가진 우리에게 이런 정서와 기대만으로도 조금은 푸근하고 따뜻한 가족 혈연의 삶을 누리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우리의 고전에서 좀 더 세심하게 우리의 정신과 생활철학과 종교심을 찾아보자면 놀랄 만한 가치와 재미가 넘친다.


심봉사는 기적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어린 내가 가졌던 의문대로 자신의 기복 신앙이나 딸의 조건부 희생에 의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주지하게 된다.

심청전 마지막 부분에서 아버지 심봉사와 딸 청이가 상봉하는 장면에서 “죽은 줄 알았던 딸이 살아왔으니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애절하게 소리친다. 그러나 볼 수 없는 신세,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자신, 맹인임을 또 다시 한번 처절하게 한탄한다. 그리고는 막무가내로 보고 싶은 갈망을 목소리를 다하도록 부르짖는다.

눈을 뜨고 싶은 그것은 욕심이라면, 보고 싶은 그것은 그 이상의 간절한 소원이었을 것이다. 목이 쉬도록 외치다가 그는 눈을 뜨고 진정한 의미의 부녀의 상봉은 우리 앞에 해피엔딩의 무대로 펼쳐지는 것이다.

볼 수 있고 소망을 이루어내는 서로를 확인하는 그 순간까지, 아버지와 딸이 겪어온 일들과 시간이 엮어온 세월을 본다. 지금처럼 속도와 기능 위주의 합리적인 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말이나 되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무슨 일과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 저러한 과정과 시간과 고통과 절망을 감수하는 인내가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것을…

또한 저절로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봉사’가 되어 진정으로 딸을 보기를 그토록 간절히 부르짖어야 하고, 삶의 동반자와 여건을 함께 모아서 끝까지 “성취하는 그 때까지” 순전한 마음으로 정진할 일이다.

나는 오늘 심봉사가 된다면 무엇을 보기를 원하는가? 진정 무엇을 보기를 원하는가? 진짜, 진짜, 목이 쉬도록 내 마음 속에서 부르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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