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리움의 계절

2001-03-2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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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병연<베데스다 신학대학>

비가 오락가락 하며 봄을 익히기에 안간힘을 썼던 지난달이다. 비가 멈춘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바닷가를 찾아 나서니 훈풍이 귓불을 간질인다. 차게 느꼈던 밤바람이 완연히 달라졌다.

봄은 우리 곁을 기웃거리고 있다. 내 나라 강산처럼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고 물에 술탄 듯 어정쩡하지만 그래도 나뭇잎의 새파란 움틈을 보면 필경 봄은 오는 것 같다. 장마철인양 짓궂게 내린 얼마 전의 빗줄기도 봄을 잉태하는데 일조했던 것 아닐까. 순회하는 계절의 섭리는 만물의 생로병사를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와 축복인가 싶다.

비 내리며 해 뜨는 연속성의 변화된 시간을 보내면서 가슴을 아리게 하는 그리움이 있어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을 찾아가 ‘아름다운 한국’이라는 비디오 테입을 빌려와 몇 번이고 보고 또 보며 그리고 내 한국 산야와 서울의 생생한 모습을 만끽했다.


아들이 군대에 입대하던 날 어머니는 곁을 떠나가는 어린(?) 자식이 염려된 탓인지 논산까지 따라오실 필요가 없다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열차에 오르실 때부터 훈련소 입구까지 울먹였고 병영 안으로 들어가는 자식의 뒷모습을 보면서 참았던 이별의 설움을 토해냈다. 국방의 의무를 필하고 국가에 봉사하는 자식의 대견함보다는 오로지 헤어져 있음을 가슴에 각인시키는 모정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의 볼에 사랑스런 입맞춤으로 작별의 인사를 하고 사나이들의 뭉침 속으로 휘말려 갔다. 보일 듯 말듯 희미해질 때까지 제자리에 석모가 되어 아들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뜨거운 모정의 눈물은 강물을 이뤘다.

어머니는 자식의 죄도 함께 해야 하는가? 젊음을 잘 이어가지 못하고 갱이라는 멍에에 갇혀 죄수의 몸이 된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일주에 한두 번씩 2년여 동안을 빠짐없이 찾아가는 모정도 있다. 가까이 마주 보면서도 입김조차 느낄 수 없고 만져 볼 수도 없는 두꺼운 유리벽이 가로막고 있다. 수화기를 통해 말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볼 수 있다는 한가지 기쁨이 그 어머니에겐 전부다.

반복된 인사말과 안부와 근심으로 주어진 시간을 채우고 나면 매정하게 차단되는 수화기를 바라보면서 피붙이의 살점 하나도 만져 보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돌아서는 발걸음은 천형과도 같다. 감방으로 향해 가는 자식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 자리에 주저 않아 하염없는 피눈물을 쏟아 붓는다.

며칠이 지난 후 접견을 신청하니 이 곳에 없다는 말에 귀를 의심하고 익히지 못한 영어가 잘못 전달됐겠지 하고 재차 서툰 말로 물어보니 형이 확정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말에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으로 종일토록 이부자리를 둘려 쓰고 통곡하며 울었다. 자신을 깨우치고 회개하며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 준다면 가슴저린 고통의 세월도 감내하며 이겨낼 수 있는 넓고 깊은 사랑이 어머니 마음이다.

칠팔월 장마비처럼 세차게 내렸던 비가 멈추고 밝은 태양이 눈부시게 떠 있으며 높고 파란 하늘이 더 한층 아름다움을 뽐내듯 어머니의 그리움을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날이 곧 있을 거란 믿음으로 모든 것을 잠시 접어두고 기다림을 익혀가자.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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