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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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졸한 반항

2001-03-2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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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숙<샌프란시스코>

두 녀석은 기고만장했다. 하교 길 우리 집 초인종을 요란스레 누르고는 줄행랑을 놓는 장난이 근 달포나 계속됐다. 그러나 문 옆에 잠복해 기어코 현장을 잡던 날, 헛것을 본듯한 녀석들의 놀란 표정에 주인인 내가 더 당황했었다. 그후 뜸해진 그들의 장난이 언제부턴가 다시 시작됐지만 그때 아이들을 놀래킨 게 마음에 걸려 오래도록 너그럽게 속아주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그 장난 벨소리가 자꾸만 귀에 거슬린다. 어쩌면 설욕의 기쁨에 푹 젖어있을지도 모를 녀석들을 생각하면 불쑥불쑥 모멸감이 들기도 했다. 마침내 엊그제, 울리는 벨소리와 거의 동시에 아니 어쩌면 그보다 빨리 현관문을 와락 열어제치고 달아나던 그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상치 못한 집주인의 기습에 그 애들은 바지라도 적실 듯한 겁먹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렇게 야멸차게 자존심을 되찾고도 한 대 얻어맞은 사람 마냥 여전히 씩씩대는데 목청 큰 전화벨이 성가시게 울려댄다. 어설픈 발음으로 나를 찾으면 그건 십중팔구 전화회사나 신용카드 혹은 보험회사들의 선전전화이기 십상이다. 아니나 다를까 상업적인 친절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나를 찾는다. "She’s not here now"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나는 내가 부재중임을 알렸다.


마음이 빈곤해진 탓인가, 갑자기 어지러운 허기를 느꼈다. 서둘러 빵 한 조각을 베무는데 김수영의 시 한편이 토막토막 떠오른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는가... 나는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들에게..."

중년의 길목, 때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인정할 용기가 내겐 왜 없는가.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화가 난다고, 작은 파도에 움츠리는 집게 같은 소심함에 화가 난다고 툭하니 인정할 용기는 왜 없는가. 진리니 자유니 정의니 하는 큰 명분들은 뿌옇게 잊고, 비껴선 자의 외진 시선으로 사소한 것들에 목숨을 거는 나는 정말 얼마나 작으냐. 친구들처럼 약간은 엄살 섞인 중년의 우울증을 앓고 싶은 나는 곧잘 엉뚱한 곳에다 자리를 편다.

우리가 분노하는 대상이 왜 하필 악의 없는 장난꾸러기 톰소여인가, 왜 힘없는 야경꾼인가. 양심부재의 정치인, 장부와 증권을 조작하는 재벌, 부패한 공무원 대신 우리는 공연히 덤이 야박한 콩나물장수만 욕하고 있다. 오만한 백인들 대신 멕시칸의 낙천적인 게으름을 타박한다.

이런저런 상념의 중간, 아이가 제 읽던 책을 불쑥 내 코앞에 들이댄다. "엄마, 이 단어 뜻이 뭐야?" "너는 사전 뒀다 뭐 할래. 네가 직접 찾아봐." 머쓱해진 아이가 돌아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엄마는 괜히 나한테 신경질이야." 괜히 나한테, 괜히 나한테... 신경질이야... 나는 무심코 아이의 독백을 따라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괜히 네게 화내지 않으마. 사실 엄마는 자꾸만 작아지는 무능한 자신이 싫었던 거야. 틀린 것을 틀리다고 말 할만큼 대담하지도, 또 내 안에 품어 잘 발효시킬 만큼 넉넉하지도 못한 옹졸한 마음에 역정이 났던 거란다. 이제 마땅히 분노할 것에 분노하고 너처럼 작지만 순수한 인생들에게 나누어줄 사랑에는 결코 인색하지 않으마.

문득 작은 악당들의 벨소리가 그리워진다. 훗날 그 겁 많은 토끼들이 자신들의 무용담을 소중하게 추억할 수 있도록 오래도록 기꺼이 미련한 거북이가 돼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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