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통일로’의 속도 제한

2001-03-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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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균희

지난 수년간의 햇볕정책의 결실로 남북한이 ‘통일로’로 나서는 첫걸음을 디딜 수 있게 된 것은 대단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김정일의 답방을 왈가왈부하는 일부 지도층의 자세나 미국의 강경 자세로의 선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북한의 열악한 인권문제와 여전한 적대행위 가능성은 모두가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이유로 더 적극적으로 개방을 유도할 것인가 아니면 이 기회에 개방을 막을 것인가의 방향설정은 우리들의 몫이다. 한국에서는 적극 개방을 유도하며 ‘통일로’로의 행진에 가속화하려는데, 미국의 새 정권은 속도제한을 거는 것 같다. 물론 공화당 정권의 보수성향과 그들의 지지기반 중에 무기산업이 차지하는 위치도 간과할 수는 없고, ‘통일로’상의 속도제한이 미국민의 의향이라거나 미행정부의 방향으로 단정하기는 시기상조이다. 그러나 실수로 보이는 부시 대통령의 일련의 언행 뒤에 감추어진 정수를 분석해 볼 가치는 있다. 통일도 다 인간의 일이라, 의식상층에 인식되지 않는 무의식적인 역동도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약육강식의 욕구는 국가 간에도 엄연히 존재해 왔다.


노골적인 식민지 정책을 표방하던 대영제국의 시대를 지나서, 이제는 곱게 포장된 욕구 충족이나 승화를 통한 높은 차원의 욕구해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약자를 돕고 인권을 권장하는’ 식의 맘 좋고 힘센 아저씨의 이미지만을 유지하기엔 벅찬 현실의 고민이 생기기 시작한다. 즉 계속 약자로만 볼 수 없을 만큼 남과 북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 잘 들으라고 원조도 해주고, 말 안 들으면 미군철수 건 등으로 겁도 주고, 통상 압력도 적절히 써가며 길들여 온 남한이 어느새 성장하여 미국의 6대 교역상대국으로 돼버렸다. 북한은 대륙간 미사일 개발, 핵 개발 등으로 골치를 썩이고 있다. 남한은 경제적으로 북한은 군사적으로 괄목한 성장을 했는데, 이 두 나라가 합하여 한 나라로 된다는 것은 주변국가들(미, 일, 중, 소)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남과 북이 이렇게 ‘통일로’에 들어서면 우리 식으로라면 어느 날 갑자기 통일을 성취할 수도 있다. 통일 한국은 해외동포 600만을 포함, 거의 7,000만명에 육박하는 대국이 된다. 인적, 물적 자원으로나, 정신력으로나, 문화, 군사, 경제적으로도 새로운 강국이 동아시아에 출현하게 될 때에, 예전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을 수도 있는 통일 한국은 그들에게는 새로운 걱정거리가 될 수도 있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서의 동상이몽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인 것 같다. 무의식에서의 문책성 질문이 바로 "누가 형님 허락도 없이 너희들끼리 화해하라고 했어?" 일지도 모른다. 싸우면 말리고 너무 가까워지면 떼어놓으며, 양편을 긴장 속에 묶어두는 것이 주변 국가들의 국익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무의식 속의 역동은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고, 오히려 의식층의 좋은 언어로는 잘 포장되어 나오는 고로, 실수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본심을 엿볼 수 있다. 공식 발언으로는 "양국간의 통일정책이 같은 방향임을 확인하고" 등등 좋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지만, 귀 있는 자들은 새겨들어야 한다.

우리 안에도 일부 통일반대 세력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 한미정상회담의 결과에 환호한다는 것은 불행이다. "거봐 뭐랬어, 어른께서는 안 좋아하시잖아, 어른 뜻대로 해야지"하며 박수치는 노예 근성은 이 기회에 버려야 한다.

’분단은 우리가 약하고 분열되어서 생긴 것처럼, 통일도 주변 국가들은 젖혀놓고라도 우리가 강해지고 합심해야만 될 수 있다’는 기본원칙을 재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된다. 실은 "주변국가들은 젖혀놓고라도 ,우리가 강해지고 합심해야만"이란 이 구절도 남과 북이 내놓고 말 할 수는 없다. 서로간에 이심전심의 교감을 갖고, 감추어진 언어들은 새겨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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