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목이, 한 세대가 떠내려간다. 이병철회장이 가고 정주영회장이 가고 전환기의 한국도 가파른 굽이를 돌아 어디론지 떠내려간다.
21일 타계한 정주영 전현대그룹명예회장은 그의 큰 배포와 기업왕국 만큼이나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전후 빈곤에서 70년대 이후 고속성장, 그리고 IMF 변란이후 계속되는 현 한국사회의 어려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와 따로 구분해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도 깊은 명암을 드리웠다.
설레는 가슴으로 새벽을 여는 평생을 살았던 정회장은 열정적 근면과 ‘하면 된다’ 정신의 표상이었다. 오늘 할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그는 새벽 4시면 일터로 나가 열심히 일했다. 밤 12시에 공사현장에 나타나 직원들이 당황하기 일쑤였다. 정회장의 땀과 용기가 밴 현대의 큰 사업장에는 그의 근면과 저돌적 사업 추진과 관련한 일화가 숱하다.
동남아 공사현장 막사에서 빈대에 물리다 꾀를 내 침상 4다리를 세수대야에 담아 물을 부어 편히 잘 수 있었는데, 며칠이 지난뒤 또 빈대에 물려 살펴보니 빈대들이 기둥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낙하를 하더라는 것. 절실히 원하면 구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정회장은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시련이 있을 뿐 불가능은 없다는 투지로 일했다.
’정주영 공법’이란 신 토목공학용어를 만들어낸 아산만 간척사업이나 철구조물 뗏목 운반작전도 현대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에서는 빠지지 않는 대목이다. 트럭으로 아무리 돌을 쏟아 부어도 센 물살에 씻겨 나가자 거대한 폐 유조선을 끌어다 막고 방조제를 쌓을 수 있었다거나, 엄청난 해상보험료 요구에 거대한 철구조물을 뗏목처럼 엮어 중동까지 운반했다는 신화같은 이야기는 모두 정회장의 일에 대한 열정과 저돌적 추진력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현대에서 막힌다고 주저하는 직원은 빈대보다 못한 놈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왕회장의 일에 대한 열정과 근면, 투지는 고속경제성장시대 한국 직장인들이 닮아야 할 덕목들이었고, 한국인들은 세계 11 경제대국으로 한국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정회장의 거대한 업적과 강점은 그러나 IMF이후 급속히 빛이 바래고 있다.
한국은 경제사회전반에 걸친 구조조정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몸살을 겪고 있다. 정경유착으로 인한 허약한 경제체질개선, 부실과 부정부패척결, 재벌경영타파등 고속성장의 그늘이 도마에 올라 질타당하고 있다.
관 주도로 멍든 금융 개혁을 위해 수백만달러를 들여 미국의 전문가들을 불러와 왕진을 받는가하면, IMF직후 유행했던 ‘바꿔 바꿔’ 추세는 지금도 한국 전체를 흔들어놓고 있다. 심지어 축구도 한국식 투지만으로는 안된다며 네델란드의 히딩크 감독을 불러다 고언을 청한다. 한국축구가 세계수준에 오르기 위해서는 브라질이나 유럽처럼 어릴 때부터 기본기를 배양하고 축구저변인구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어제의 강점이 오늘의 취약점으로 부각되고 어제의 투지가 오늘의 무모함으로 돌변했다. 그러나 그 열정과 투지가 없었다면 오늘까지 달려올 수 있었을까.
우리는 지금 안다. 앞만 보고 저돌적으로 달린 한국경제와 사회, 가정이 많이 멍들었고 양적 성장에 못지 않게 질적 성숙이 필요하다는 것을. 족벌세습경영과 정경유착, 부정부패를 버리고 건전한 부의 축적과 사회환원, 인간중심의 기업문화 정립이 절실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새로운 발전으로 가는 출발이다. 막히면 뚫는 수 밖에 없다.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총체적 난국은 결국 엄청난 열정과 투지로 일해서 해결해 나가는 수 밖에 없다.
정회장이 살아 젊었다면 지금 한국의 난국에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아마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양적성장뿐 아니라 질적 성숙도 포커스만 맞으면 문제해결의 방법은 같은 것 아닐까. 열정으로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다.
공이 큰지 과가 클지는 아직은 평가가 이르다. 역사에 맡겨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회장이 설레는 가슴으로 일을 맞이 했던 것처럼 문제를 열정적으로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