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넓어지는 통역의 세계

2001-03-2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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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이<법정통역사>

세계가 한 생활권으로 좁아지면서 통역이 점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통역사들의 잦아진 타지역 출장이 한 증거가 된다.

나의 경우 지난 5년 동안 멀리로는 캐나다, 멕시코, 한국과 프랑스에 출장을 갔었으며 미국 내에서는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애리조나, 텍사스, 플로리다, 뉴욕 등 거의 전역을 다녔다.

컨퍼런스 통역을 하고 광범위한 민사사건을 맡게 되면 한국과 미국내 대 도시는 많이 여행하게 된다.


한국어 영어 통역의 경우는 아직 컨퍼런스 통역 기회는 많지 않고 비즈니스 통역으로 인한 출장이 많다. 해외 여행의 매력 때문에 통역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이 통역사라는 직업의 이점의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여행에만 눈이 어두워 여행 준비만 하고 통역 자료나 용어 공부를 게을리 한다면 결국에 가서는 여행의 즐거움도 맛보기 어렵게 된다. 어떤 말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통역 분야의 준비를 안 하면 불안하고 초조하며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다.

통역사는 성우나 아나운서처럼 가려진 장막의 배후에서 일하는 숨은 직업인이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중대한 역할을 맡아 수행하기 때문이다. 법정에서나 정상회담에서 통역사가 큰 과오를 범한다면 단순한 망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결과나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피고가 ‘네’ 하고 답한 내용을 ‘아니오’라고 통역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조지 부시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말실수를 한 내용이 그대로 통역된 것을 본다면 미국측 통역이 과연 미국을 위해 긍정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였는지 의문이 간다. 왜냐하면 정부 공무원인 한국측 통역사는 사소한 실수는 살짝 수정하거나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문제에 있어서 통역의 역할은 중요하다. 실제로 구 소련의 경우 많은 통역사들이 장관이나 부장관의 직책을 지녔기 때문에 민감한 사항에서는 대충 넘어가거나 자신들의 국가에 이롭게 통역한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의 전 장관들이 쓴 여러 서적에서도 이점이 지적되었다. 구 소련의 브레즈네프 전 서기장이 키신저나 닉슨 대통령에게 주정한 사실은 유명한 일화가 된다. 만일 술 주정까지 그대로 통역했다면 가뜩이나 냉전 상태의 미국과 소련이 어떻게 되었을 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통역사들 사이에서 나누는 농담이 있다.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통역을 정확히 하면 그냥 탈 없이 일이 끝나지만 한번이라도 주요 실수를 범하면 확실하게 지적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을 아무리 잘해도 치하는 바라기 어려운 반면 조금만 잘못하면 욕을 잔뜩 먹을 수 있다는 진담 섞인 농담이다.

통역은 집중력, 순발력과 문장력이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하는 직업이다. 이에 아울러 단기 기억력과 노트 메모 기술은 필수적이라고 본다. 국제 교류가 점점 활발해지는 만큼 통역사의 전망은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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