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업셋, 역전극... 삼월의 광란

2001-03-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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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러시움

▶ 박덕만 <편집의원>

요즈음은 프로 스포츠의 그늘에 가려 시들해졌다지만 60~70년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던 스포츠는 고교야구였다. 특히 한국일보·일간스포츠가 주최하는 봉황대기는 전국의 고교팀들이 모두 참가해 명실공히 한국 고교야구의 왕중왕을 가리는 대회로 권위가 있었다. 내 고향, 출신고교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직장인들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져나와 지금은 동대문구장으로 불리는 서울운동장 야구장으로 몰려들었다. 구장 밖 노점상에서 소주와 오징어를 사들고 입장하면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쉽사리 어울려 소주잔을 나눴고 목이 터져라 응원전도 펼쳤다. 몸 아프다고 직장을 빠졌던 샐러리맨, 외간 여자와 구장을 찾았던 유부남이 중계 카메라에 얼굴이 비치는 바람에 상사와 와이프에게 경을 쳤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흔했다. 경남상고와 군산상고, 경북고와 광주일고 등 영호남 라이벌이 결승에서 맞붙을라치면 입장권을 구하기도 힘들어 웃돈을 주고 암표를 사야 했다.

고교야구가 그같이 열기가 있었던 것은 향토색 때문이다. 내 고향, 출신학교를 사랑하는 향토색은 정치인들이 제고장 사람만 중용하고 타지방 사람은 배척하는 지방색과는 차원이 다르다. 최근 프로야구 경기에서는 홈팀이 지면 팬들이 난동을 피우는 일이 있다지만 고교야구 대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우리 팀’이 이기면 좋지만 최선을 다했다면 지더라도 무방했다. 경기가 끝나면 이긴 팀과 진 팀 선수들이 나란히 서서 악수를 교환하고 응원단이 있는 곳으로 와서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다. 관중들도 이긴 팀 선수나 진 팀 선수 가리지 않고 격려의 박수를 쳐주었다.

한국의 고교야구와 닮은, 향토색이 물씬 풍기는 미국의 스포츠 행사가 바로 ‘삼월의 광란’으로 불리는 NCAA 대학농구 토너먼트다. 일년에 한차례 미국내 수백, 수천여 대학농구 팀중 최상위 64개 팀이 모여 왕중왕을 가리는 행사다. 올해는 LA지역에서도 UCLA, USC에 칼스테이트 노스리지까지 3개 팀이 토너먼트에 출전했고 UCLA와 USC는 ‘스윗 식스틴’으로 불리는 16강에까지 올랐다. 양팀 모두 22일 필라델피아에서 있을 16강전에서 워낙 막강한 상대를 만나게 돼 ‘엘리트 에잇’ - 8강에 진출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지금까지의 전적만으로도 LA 스포츠팬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선사한 셈이다. 사실 USC가 ‘파이널 4’-4강 후보중 하나인 보스턴 칼리지를 꺾고 16강에 오른 것만도 기대 이상의 성과며 칼스테이트 노스리지는 토너먼트 참가 자격을 얻은 것 자체가 빅뉴스였다.


NCAA 토너먼트나 한국의 고교야구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예상을 뒤엎는 승부-’업셋’의 가능성이다. NBA 프로농구·메이저리그야구 경기가 흠잡을 데 없는 기량으로 기름칠을 한 듯 매끈한 느낌을 준다면 NCAA 대학농구·한국의 고교야구 경기는 비록 설익은 기량 탓에 허점은 많지만 넘치는 투지에서 느껴지는 참신한 맛이 있다.

NCAA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64개팀은 4개조로 나뉘어 실력에 따라 1번부터 16번시드를 배정 받아 1번과 16번, 2번과 15번팀이 맞붙는 방식으로 대진한다. 지금까지 16번시드가 1번시드 팀을 이긴 ‘반란’은 여자부에서 한차례, 남자의 경우는 60여년 역사상 단 한차례도 없었지만 대회 초반 하위시드 팀이 예상을 뒤엎고 상위시드 팀의 덜미를 잡는 업셋은 심심찮게 발생한다.
이번 대회 최대의 업셋은 서부조 1라운드에서 2번시드의 아이오와 스테이트가 무명의 15번시드 햄튼에게 역전패 당한 것. 경기종료 7분여를 남겨놓고 9포인트의 여유 있는 리드를 잡고 있던 아이오와 스테이트는 종반 지연 작전을 펼치다가 사상 처음으로 NCAA 토너먼트에 출전한 햄튼의 투지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한국 고교야구로 말하자면 우승후보 군산상고가 대회에 처녀 출전한 경기고에게 1회전에서 역전패 당한 격이다.

"야구는 9회 말 2아웃부터"라는 말을 유행시킨 군산상고의 역전극처럼 NCAA 토너먼트에서도 막판 역전의 묘미가 있다. 1992년 NCAA 토너먼트 결승전 경기종료 2.1초를 남겨둔 상황에서 듀크의 크리스천 레이트너가 그랜트 힐이 베이스라인에서 던져준 70여야드 패스를 받아 성공시킨 점프슛, 90년 코네티컷의 테이트 조지와 스캇 버렐로 연결된 ‘베이스라인 투 베이스라인’ 슛 등은 팬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역전극이다. 지난1995년 NCAA 토너먼트 2라운드에서 타이어스 에드니의 단독 드리블 역전 드라마가 연출되지 못했다면 UCLA의 챔피언 등극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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