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역사는 인물이 만든다

2001-03-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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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k Review

▶ 옥세철 <논설실장>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10년의 시기’(decade)는 언제일까.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미국의 세기’를 펴게 된 1940년대의 10년일까, 아니면 미국이 분열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흑인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1860년대의 10년일까. 1790년대의 10년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런 주장을 편 사람은 조셉 엘리스다. 건국 초창기인 이 10년의 시기는 그때까지만 해도 전대미문인 공화 민주정 미합중국이라는 나라가 갓 태어나 골격이 짜여진 시기이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의 방향이 결정됐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엘리스의 주장은 맞을지 모른다. 200년 역사의 미국 정치 시스템이 오늘날 민주국가의 전 세계적 모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엘리스는 이 시대의 위대한 정치인들, 즉 건국시대의 정치 지도자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 한 권의 책을 써냈다. ‘건국의 형제들’(Founding Brothers·$26·248페이지)이다.


존 애덤스, 아론 버, 벤자민 프랭클린, 알렉산더 해밀튼,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메디슨 그리고 조지 워싱턴. 이들은 미국 역사의 신화적 존재다. 이들간의 관계, 특히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낸 미건국 초기시절 이들이 어떤 역할을 했고 서로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집중 조명한 책이 ‘건국의 형제들’이다.

작자가 조명하려고 한 것은 이 기라성 같은 건국의 시조들간의 돈독한 우정과 적대감 등으로 맺어진 관계가 신생국 미합중국의 골격을 이루는데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을 필연적 시대의 흐름으로 파악하기보다는 한 시대를 이끈 주역들의 성격을 통해 조명한 것이다.


작자는 이를 통해 한가지 관점을 제시해 준다. 오늘날 미국의 정치제도가 지니고 있는 특징 중 적지 않은 부문이 미건국 초기 정치 지도자들간의 관계에서 비롯됐다는 관점이다. 때로는 협력을 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대립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타협점을 찾아냈고 그 타협의 정신이 미국을 떠받드는 제도의 틀 속에 용해됐다는 지적이다.

이 책에는 특별한 연대기가 없다. 그러나 나름의 독특한 체계와 목표가 있다. 작자는 스토리를 아론 버와 알렉산더 해밀튼과의 그 악명 높은 결투로부터 시작해 건국 초기 결정적 시기에 있었던 6건의 별개 사건에 차례차례 포커스를 맞추었다. 해밀튼, 제퍼슨, 그리고 메디슨간의 비밀회합을 통한 대타협도 그 중의 하나다. 신생 미합중국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나선 프랭클린과 이를 봉쇄하려는 메디슨, 또 2기 연임 끝에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남으로써 독특한 미국적 전례를 남긴 워싱턴의 고별의 모습 등도 차례로 그려진다. 작자는 또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 단임으로 끝나는 애덤스 대통령, 그리고 만년에 다시 우정을 회복하는 애덤스와 제퍼슨의 관계 등을 파헤치면서 이들간의 관계에서 빚어진 사건들이 어떤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고 궁극적으로 초기 미합중국을 형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적한다.

엘리스는 공인으로서의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인간으로서 건국의 시조들의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 "토머스 제퍼슨은 정직하지 않았다. 그는 알렉산더 해밀튼을 정적으로 음해했을 뿐 아니라 조지 워싱턴에 대해서도 중상모략을 서슴지 않았다. 인생의 황혼기에도 그의 중상모략은 여전했다… "조지 워싱턴은 이빨이 신통치 못했다. 얼굴에는 마마자국이 있고 눈에 비해 눈구멍이 너무 큰 편이었다. 엉덩이는 넓은 편이지만 어찌됐든 이런 신체적 특징이 조화를 이루어 당당한 풍모를 엿보이게 했다."

건국의 아버지들을 반쯤은 신이 된 듯한 영웅의 모습으로만 그린 역사책에 싫증이 난 사람에게는 엘리스의 이같은 접근법은 신선하게 다가올 것 같다.

작자는 제퍼슨에 관해 특히 많은 부문을 할애하면서 워싱턴 행정부 말기 ‘반 워싱턴 책략’을 구사하는 제퍼슨의 행태를 비교적 소상히 파헤친다. 제퍼슨의 이같은 시도는 행정부의 파워가 커지는데 대해 브레이크를 거는 시도였다는 해석. 그러나 한 국가로서 아직 유년기를 못 벗어난 당시의 단계에서 공화국으로서 미국을 지탱시킨 것은 강한 행정부이고 워싱턴이 대통령직을 확립시킴으로써 행정부의 파워가 강화됐다는 평가다.

애덤스와 제퍼슨간의 돈독한 우정도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둘간의 우정은 그렇지만 변질돼 애덤스 행정부 말기에는 격렬한 증오로 변한다. 오랜 우정의 파탄기를 거친 후 이 둘이 화해를 하게 되는데 그 계기를 작자는 아주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제퍼슨은 애덤스가 제퍼슨의 부하에게 "나는 언제나 제퍼슨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말한 것을 전해 듣는다. 제퍼슨은 바로 자신의 친구이자 애덤스의 친구이기도 한 벤자민 러시에게 편지를 쓴다. ‘나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이다. 이로써 둘 간의 불화는 종식되고 이 두 전직 대통령간에는 이후 14년에 걸쳐 그 유명한 158통의 서신이 교환된다. 미건국 50주년이 되는 독립기념일 날 이 둘은 불과 다섯 시간 차이로 차례로 숨을 거둔다. .

미국형 민주 공화정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게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이다. 이 견제와 균형은 흔히 제도화 된 미국적 시스템으로 설명된다. 엘리스는 이를 다른 각도로 설명한다. 신생 공화국 미합중국의 장래에 대해 서로 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던 건국의 아버지들이 서로간의 차이를 조정하다가 이루어진 게 바로 견제와 균형의 정신이라는 주장이다. 지도자들의 성격이 제도 창출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 책은 다른 건국의 아버지들에 비해 작자가 제퍼슨에게 지나칠 정도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비판도 따른다. 아마도 작자인 엘리스가 ‘제퍼슨 전문가’로 제퍼슨 전기인 ‘아메리카의 스핑크스’의 저자이고 다른 건국의 아버지에 비해 제퍼슨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미국의 정치체제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 공화정 체제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 시스템은 여전히 탄력성이 가장 풍부한 제도로 남아 있다. ‘건국의 형제들’은 미국의 과거 정치와 오늘날의 정치를 이해하고 또 미국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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