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뻔뻔한 일본 정부

2001-03-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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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태호 (변호사)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도 5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전쟁이란 단어 속에는 주로, 치열한 전투와 사상자, 폭격과 파괴, 가슴아픈 이별 등만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 전쟁 뒤편에는 거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묻혀져 버린, 몸서리 쳐지도록 잔인한 일본의 만행과 비인간적인 범죄행위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12세, 13세의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짐승처럼 정조를 유린하고는 수 만리 떨어진, 동남아시아, 남태평양군도, 또는 중국 내륙으로 짐짝처럼 보내어, 일본군의 성적노리개로 사용하였다. 어쩌다 생긴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주도적이고 면밀한 계획과 작전아래 이러한 범죄행위가 이뤄졌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정신대의 존재 자체를 완강히 부인해 왔었지만, 지난 1991년, 고 강덕경 할머니의 증언과 이후 200명에 가까운 정신대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일본 정부는 정신대의 존재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엄연한 사실과 증거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관여를 부인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구실을 붙여 마치 민간 단체의 행동인 것처럼 또는 매춘부의 행동으로 조작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이러한 범죄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수많은 정신대 피해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생매장했다는 사실은 생존한 정신대 피해자나 현장에 있었던 다른 많은 증인들에 의해 밝혀진 바다. 일본의 법정에서 그동안 몇 명의 정신대 피해자가 소송을 제기해 보았지만 단 한 건도 승소해 본적이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처음에는 존재 사실 자체를 부인했고 이제는 그 피해는 인정하나 청구권 소멸시효로 인해 또는 적용할 수 있는 배상법규가 없기 때문에 소송 자체를 기각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 정부는 진실로 역사 앞에서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한 후 진정한 배상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다는 것이다.

독일의 2차 대전 전쟁범죄에 대한 자세와 그 후 피해자에게 보여준 태도와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의 차라 하겠다. 이렇게 뻔뻔스런 일본정부를 단죄하기 위해서 피해자들은 지난 9월 18일 워싱턴 DC의 연방법원에 직접 일본 정부를 피고로 해서 20여만 명이 넘는 한국 피해자와 중국인, 필리핀인, 대만인 피해자들을 포함한 집단 소송을 제기해 놓았다.

일본정부는 예상대로 지난 3월 7일 국가로서의 면책특권을 이유로 소송기각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원고측 변호인단은 일본정부의 이러한 면책특권 주장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이미 법원에 면책특권 주장 불가에 대한 사전판결을 신청해 놓았다. 이제 정신대에 관한 일본의 범죄사실이 낱낱이 미국 법정에서 밝혀져야 하고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일본은 지금까지 어떠한 소송에서도 사실 자체에 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피해 왔고 소송 전략자체도 사실에 관한 언급이 필요 없는 법적 논리를 줄곧 사용해 왔다. 지난 2000년 12월에 동경에서 있었던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국제 모의 재판은 일본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고 국제노동기구(ILO)도 오는 2001년 6월에 유엔 총회에 제출할 보고서를 통해 "일본 정부가 정신대 피해자 배상 청구인들과 그들을 대표하는 단체들과 협의를 해서 더 늦기 전에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방법으로 희생자들에게 보상할 수 있는 대안을 강구하기를 기대한다"며 "희생자에 대한 구제는 오직 ILO 협약의 책임 있는 당사자인 일본정부에 의해서만 제공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세계가 일본의 만행과 전쟁범죄에 대해 법적 배상을 비롯한 완전한 보상과 함께 책임자의 처벌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로 끌려가 노동을 착취당한 징용피해자들도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일본이 제출한 자료에서 나타나듯이 징용피해자의 숫자는 약 700만 명에 이르고 사망이나 행방 불명된 자들도 수십만 명에 이르고 있다. 전쟁터가 아닌 강제 노역현장에서 이러한 사망자가 수십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은 전쟁터보다 더 잔인한 학대와 위험한 노동 조건을 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 동안 여러 건의 강제 징용 소송이 미국내의 법원에 제기되었고 현재 중국인과 한국인 피해자의 소송이 샌프란시스코의 연방법정에서 진행 중이다.

지난 3월 1일, 법원은 캘리포니아 민사소송법 354.6조의 미국헌법에 대한 위헌 여부에 대해 양측의 의견서를 제출받았고 조만간 판결이 내려질 전망이다. 또한 캘리포니아주 민사지방법원에서 진행중인 한국인 정재원씨의 징용소송은 현재 증거 수집을 위한 단계에 있으며 지난 2월 27일에는 미쓰이와 미쓰비시을 상대로 한 새로운 징용 소송이 캘리포니아 주법원에 제기 되었다.

일본은 역사를 돌아보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떠한 국가도 인륜에 반한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그 대가를 치르지 않은 기록은 없다. 일본은 아직도 늦지 않았음을 깨닫고 진심으로 그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정당한 배상을 하길 바란다. 깨끗한 과거의 청산 없이는 세계의 어떤 나라도 일본을 우방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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