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란머리 손자

2001-03-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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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0월24일은 ‘유엔의 날’이다. 지금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기념할만한 날중의 하나로 꼽혔다.

매년은 아니지만 2년에 한번 꼴로 ‘유엔의 날’을 지키는 가정이 있다. 남가주 보건의학계의 원로 한응수(79)박사 가정이다. 5남매의 배우자들이 모두 타인종이어서 손자손녀까지 3대가 모이면 가히 ‘국제연합’회의장을 방불케 하기 때문에 가족들이 붙인 이름이다.

첫 사위는 프랑스인, 둘째 사위는 스웨덴인, 셋째 사위는 오스트리아계이고 두 며느리도 독일계등 백인여성이다. 손자 손녀들은 자연히 백인-아시안 혼혈이어서 이 집안에서는 인종 개념이 사라진지 오래다. 가족들이 이렇게 편안하게 ‘인종의 벽’을 넘어 ‘국제화’하게된 것은 한박사의 평생이‘국제적’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유엔 세계보건기구(WHO)의 의무관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20여간 23개국을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사모아를 시작으로 한국사람이라고는 구경도 할수 없는 곳들만 다녔다. 그리고 나니 ‘내 민족’‘내 국가’라는 울타리 개념보다는 전 세계인을 한 가족으로 보는 열린 시각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인종이 뒤섞인 사회, 그래서 인종의 벽이 허물어진 사회 - 이번주 발표된 2000년 인구조사 결과를 보면 장차 미국사회는 아무래도‘인종없는 사회’로 귀결될 전망이다. 혼혈 인구가 급속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2억8천여만 전체 인구중 현재 혼혈인구는 680만으로 아직은 2.4%에 불과하다. 하지만 타인종간 결혼이 10년전에 비해 4배가 늘었고, 18세 미만 아이들의 혼혈비율(4.2%)이 어른들(1.9%)에 비해 두배가 넘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백인-흑인-인디안-아시안 피가 골고루 섞인 골프 천재 타이거 우즈의 모습이 미국의 전형적인 얼굴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타민족 사위·며느리 보게 될까봐, 노란머리 손자 보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는 1세부모들에게는 불안한 소식이 아닐수 없다. 이번 센서스 결과를 보니 자녀 혼사문제가 새삼 더 걱정이 되더라는 부모들도 있다. 이런 걱정들에 대해 혼혈가정의 선구자, 한박사는 말한다.

“이제 21세기인데 작은 울타리 쳐놓고 끼리끼리 살때는 지났어요. 특히 LA에서 자라면 히스패닉과의 결혼, 백인과의 결혼이 많이 생길 겁니다. 시간의 문제일뿐이지요”

현재 아시안 3세의 경우 타인종과의 결혼은 50%를 넘는다고 한다. 중국계, 일본계등 같은 아시안 사이의 결혼까지 합치면 족외혼의 비율은 훨씬 높다. 한민족의 혈통을 지키며 전통을 잇고 싶은 1세부모들의 바람은 조만간 현실과 타협점을 찾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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