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말꾼들의 장난

2001-03-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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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영<본보 뉴욕지사 주필>

사람의 말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말을 한번 내뱉고 나면 쏟아진 물처럼 주워 담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말이 멍에가 되어 항상 자신을 옭아맨다. 말은 천냥 빚을 갚기도 하고 설화를 불러 목숨을 잃게도 한다. 말로 약속을 하면 지켜야 하기 때문에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세상살이에서 입 조심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말을 너무 쉽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사실이 아닌 거짓말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한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아첨하는 말을 해대는가 하면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으로 남을 헐뜯는 사람도 있다. 말이란 말 그대로 믿어야 하는데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들이 많으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지경이다.

더구나 거짓말을 하고 아첨을 떨고 중상모략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요즘 세태이다. 정치인들이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을 하고 나중에 문제가 되면 “말한 적이 없다” “와전됐다”는 등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라든지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말로 곡학아세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이럴 때 말발이 서지 않는 백성들은 주먹 앞에서 당하는 것과 똑같은 억울함을 당하는 심정이 된다.


지금 한국에서 엉뚱한 말 때문에 말썽이 일고 있다. 여당인 민주당의 연구소 부소장이라는 대학교수 한 사람이 국회의원들을 모아놓고 한 말 때문이다. 그 말이란 “6.25전쟁은 김정일이 유아시절에 발발한 만큼 책임이 없고 침략범죄 용의자도 아니다” “김정일은 87년 11월 대한항공기 폭파를 지휘했다는 증거도 없고 조사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힐 말이다.

김정일이 유아시절에 6.25가 났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면 유아시절에 2차대전을 겪은 일본과 독일의 정치 지도자들이 왜 과거를 사과했는가. 일본이 왜 한일회담 때 한국에 청구권 자금을 제공했고 지금 북일회담에서 배상문제가 논의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무엇 때문에 정신대 문제가 거론되고 있겠는가. 히틀러가 저지른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에게 현재의 독일정부가 피해보상을 해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는가 말이다.

또 KAL기 폭파사건은 북한 공작원이었던 김현희가 전모를 밝혀 주었으므로 김현희라는 증거가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도 김정일이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제정신으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 불화관계를 청산하고 화해를 모색하려면 우선 사과와 용서의 과정이 선행한다. 과거에 잘못한 사람은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상대방은 그 사과를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화해관계가 시작된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이런 순서는 마찬가지로 필요한 절차이다.

김정일이 한 사람의 자연인이 아니라 한국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불행한 사태를 일으켰던 북한정권의 총수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지식인이란 사람들이 이렇게 튀는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식이란 수단을 활용하여 현실적 명리를 최대한 추구하려는 의도 때문이 아닐까. 마치 요즘 방영되고 있는 사극 ‘태조 왕건’에서 아지태 처럼 과속질주한 지식인들이 일제시대에는 일제를 부추겼고 독재시대에는 독재를 합리화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제 남북 화해 시대라고 하니 말께나 하고 글께나 쓰는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처럼 권력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말을 발명이라도 해야 하겠다는 모양이다.

그러나 말이란 그렇게 마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필부의 말이라면 주위의 몇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지만 지식인의 망언은 나라를 멍들게 한다. 지금은 상식 있는 사람들이 이런 요설을 경계할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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