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젖은 낙엽’ 신세 면하려면

2001-03-1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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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종윤 (수필가)

중년 이후에 정년퇴직을 하였거나 직장을 잃어 자의든 타의든 할 일이 없어진 남자들을 일본에서는 "커다란 쓰레기" 또는 "젖은 낙엽"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젖은 낙엽"이란 이런저런 이유로 할 일이 없어진 중년 이후의 남자들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몰라 마켓은 물론이고 어디든지 아내가 가는 곳이면 뒤를 졸졸 따라다녀, 찰싹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젖은 낙엽에 빗댄 말이다.

미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셔터 보이"란 말이 있다. 많은 이민 가정이 스몰 비즈니스에 종사하다 보니 자연히 아내가 주도권을 갖게되고 남자는 셔터나 열고 닫아 뒷전에서 도와주는 사람이란 말이다. 얼마 전 한동안 유행했던 한국의 우스개 소리 간 큰 남자 시리즈 등도, 모두가 달라진 세태를 반영하는 결코 웃어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주부(主夫, 가정에서 가사를 전담하는 남편)라는 단어가 생긴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남편이 밖에 나가 일을 하고 아내가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던 산업사회의 전통적 패턴이 완전히 역전된 형태다. 물론 주부(主夫)라는 말이 생겨나기 이전에도 뒤바뀐 형태의 가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시작된 컴퓨터 혁명은 남성의 힘을 요구하던 산업사회로부터 힘이 없는 여성들을 해방시키고 밖으로 끌어냈다. 어떤 의미에서는 컴퓨터와 정보화 사회가 여성들을 해방시킨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은 증대되었고 상대적으로 남성의 기득권은 중대한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느 정신과 의사는 현대사회의 이러한 현상을 "아버지(남성)가 사라져 가는 사회"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남자들이 위축된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는 자칫 잘못하면 본의 아니게 불행의 늪으로 빠질 수가 있다. 종종 한인사회에서 발생되는 총기 살인 사건의 원인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경제가 우선인 사회, 돈 때문에 벌어지는 온갖 험한 일들도 남성들이 바뀐 세태를 바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아내들의 도움을 얻는다면 보다 좋은 가정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가정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가정불화, 경제적 위기 등의 단순한 이유로 총기를 휘둘러 본인은 물론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불행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

일본의 인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나의 주부(主夫)생활」이라는 수필에서 "결혼하고 2년째쯤 되었을 때의 일인데, 나는 반년정도 주부(主夫) 노릇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이렇다 할 일도 없이 극히 평범하게 하루 하루를 보냈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반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한 페이지였던 것 같다. 나의 개인적 경험에서 말하자면, 세상의 남자들은 일생중 적어도 얼마 동안은 주부(主夫) 역할을 해보아야만 하지 않을까 한다"라고 고백하면서 주부(主夫)의 역할이 현대인의 건강한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한국에서는 황혼 이혼이 사회문제가 되었고, 일본에서는 남편의 정년퇴직 이혼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 시절 여성들은 자녀와 경제적 무능 때문에 참고 살 수 밖에 없어 황혼이나 남편이 정년퇴직 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지만, 오늘날 여성들은 아까운 젊음을 희생할 이유가 없어졌다. 따라서 시대에 뒤떨어진 남편을 용서하고 기다려 주지 않는다.

스스로가 바뀐 세상을 바로 보고 사는 방법 밖에 없다. 젖은 낙엽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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