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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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왕따’는 밖에서도 ‘왕따’

2001-03-1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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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란<심리상담가>

얼마 전 옛 동료 교수가 미국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고교 1학년 딸아이가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친구들에게 ‘왕따’당하는 것 같아 미국에 유학 보냈으면 한다며 내 의견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때의 내 의견은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어느 정도 구멍을 땜질해서 내보내야만 미국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상식적인 이치지만 막상 자신에게 이런 문제가 닥치면 당황한 나머지 핵심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가족이 그 아이문제를 어떻게든 피해가고 싶은 마음이 앞선 것일지도 모른다. 그 아이의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로 부모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귀국한 후 만나본 그 여학생은 예상대로 집에서 항상 외톨이였다. 가족들과 식사를 할 때나,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 때나, 온 가족이 외출할 때도 그 아이는 마치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되고 있었다.


집안에서 딸아이의 이같은 상황을 가족들은 그저 “원래 말수가 적은 아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문제는 친구들이나 학급 분위기 같은 사회환경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말없이 앉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딸이 딱하거나 안스럽다는 생각이 들면 “이것 먹어라”“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라”“왜 말이 없느냐”등의 명령적인 말만 불쑥 불쑥 내뱉는 것이 습관처럼 돼있었다.

그러나 가족 중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열린 마음으로 말을 건네며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녀가 가족들로부터 이미 조금씩 소외돼왔다는 사실을 가족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집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훈련받지 못했다면 학교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적절하게 행동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했어야 한다.

자녀들이 밖에 나가서 친구들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거나 잘 어울릴 수 있으려면 먼저 가족들 속에서 친밀한 인간관계를 배우고 훈련돼 있어야 한다. 인간관계의 시작은 바로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가족들과의 인간관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이루고 있는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

어머니와 나, 아버지와 나, 그리고 형제들과 나 사이에 맺어온 관계의 방식을 원용해서 이웃과 학교와 사회로 확대시켜 나가는 것이다.

가령 어머니가 “너 숙제 마쳐야 밥 줄꺼야”“심부름하면 TV보게 해줄께”하는 식으로 자녀에게 조건적으로 대하면 아이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자신의 필요에 의한 시장원리에 따르는 인간관계를 답습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모나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해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알게 모르게 마음속에 새겨지게 마련이다.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 그것을 찾는 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이고 동시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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