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75세의 꿈

2001-03-1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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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은진<코스타 메사>

20여년 전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분이 있다. 한국에 계시는 그분은 자녀들이 LA에 있어 가끔씩 이곳을 방문한다. 뉴욕에 살다온 나는 얼마전 그분을 정말 여러 해 만에 만나 뵙게 되었다.

그 분은 올해 꼭 75세가 된다. 씩씩한 걸음, 밝고 환하게 웃는 얼굴, 품이 넉넉한 통치마 위에 걸치신 유행과는 상관없는 깃 넓은 재킷, 꼬불꼬불하지만 단정히 빗어 넘긴 흰 머리칼, 웃을 때는 양 입가에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아직도 몹시 귀여운 분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난 아직도 하고 싶고 해야할 일도 너무 많으니 참 야단났지요?"


"그 하고 싶으신 일이 뭔데요?"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그러자 그 분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꿈을, 아니 요즈음에는 그걸 비전이라는 고급스러운 말로 표현하던가. 그 비전을 활짝 펼쳐놓기 시작한다.

그 분은 44세에, 한창 학교에 다니고 있던 3남매를 떠 안은 채, 홀로 되었다. 목사이던 부군은 그렇지 않아도 생활에는 별로 큰 도움이 못 됐더랬는데 그나마 지병이 악화되어 먼저 천국으로 가버렸다. 애면글면 아이들과 살아내기 위해 온갖 시련 끝에 그 분도 부군의 뒤를 이어 주님의 종이 되었다. 그것도 교도소 내의 교목으로... 30년, 죄수들의 어머니요, 누나요, 선생님이요, 전도사로 저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하다가 이제는 자녀들도 모두 장성하여 어머님의 뜻을 좇아 같은 길을 가게 되었고, 당신은 좀 쉴 때도 되었으니 마음 맞는 사람들과 여행도 하고 같이 식사도 하면서 한가히 노후를 즐긴다해도 누가 뭐랄 건가. 그러나 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한다.

"그건 말이죠. 집 없고 갈데 없는 교역자들의 노후를 위한 집을 짓는 거예요." 그 분의 계획은 정말 엄청났다. 뭐 무슨 든든한 빽이나 굉장한 돈이라도 있는 건가? 그러나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니 전혀 근거 없는 비전은 아니다.

그동안 한푼 두푼 근근히 모아 10여년 전에 17평짜리 아파트를 사서 내 집 장만을 하고 살았는데 그것이 지금은 꽤 나가는 부동산이 되었고 그것도 재건축을 하면 더 나가게 됐다. 그것을 노인 교역자들을 위해 종자돈으로 내놓겠다는 것이다. 이미 자녀들도 기쁘게 찬성했고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평생 남을 위해 사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더니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고 보내셨기 때문이다"는 일관된 인생관으로 살더니 75세에도 시들지 않는 푸른 꿈을 가꾸며 아직도 그 푸르름처럼 씩씩한 젊음을 지니고 사는 그 분, 불로초가 어디 따로 있나. 늘 남의 유익을 생각하며, 나로 인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밝아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마음, 그 푸른 정열이 불로초가 아니고 무엇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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