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잊지 못할 만남들

2001-03-1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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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응태<헌팅턴 비치>

1976년 브라질의 상파울로 공항에서였다. 상파울로 KAL 사무실 신설을 위해 며칠 동안의 출장일정을 마치고, 배웅 나온 그곳 사무소장, 친척 가족들과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공항로비 저쪽에서 두 사람이 숨을 헐레벌떡거리며 다가와서는 “최응태 선배가 맞지요”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한 사람은 낯이 익어 대번에 알아보았는데 또 한 사람은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신의주 동중 한해 후배라고 한다. 설명을 듣고 자세히 보니 어렴풋이 옛 얼굴 윤곽이 떠오른다.


반가웠다. 고마웠다. 전연 뜻밖에 땅 끝에 와서 이렇게 만나다니. 그래 내가 여기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고 물었더니, 그곳에서 발행되는 일본어 신문에서 기사를 보고 KAL 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만남은 1989년 4월초 평양 고려호텔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해외동포의 방북을 허용하고 이북에서도 해외동포 원호위원회가 해외동포의 방북을 환영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5형제의 맏이로 단신 월남했기 때문에 3명의 동생과 4명의 사촌 남매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서신 왕래를 통해 알고 있었고, 아버지 어머니는 돌아가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일행 9명과 함께 고려항공의 작은 비행기를 타고 순안 공항에 내렸을 때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공항에 마중 나온 이가 내 바로 아래 동생이라는데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한참 부둥켜안고 울고 나서 자세히 뜯어보니 옛 모습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았다.

동생 가족들과 4박5일을 같이 지내고 호텔에 돌아와서 막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미국 교포인 듯 보이는 연세 지긋한 분이 무거운 트렁크 2개를 쩔쩔 매며 타고 있었다.

“미국에서 오신 분 같은데 어데서 오셨습니까? 저는 LA에서 왔습니다”

“뉴욕이오”


“어데로 가시는 겁니까?”

“신의주요”

신의주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나도 신의주 살았는데요”

“신의주 어데요?”

“저 신의주 동중 단녔습니다”

“나도 신의주 고보 나왔는데, 9회예요”

“저는 19회입니다”

뜻밖에 선배를 만나 반가워하며 황급히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말씀 드리고 총총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미국 돌아와서 알아보니 그 선배는 뉴욕지역에서 큰 사업을 하는 분이었다. 동문의 끈끈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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