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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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 정신과 이민사회

2001-03-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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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익근 (목사)

한국지성사의 거목 함석헌(1901∼1989) 선생이 13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함석헌은 독재정권을 비판해온 재야 지도자로 주로 알려져 있지만 압제에 대한 그의 저항은 3·1 독립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에서 그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은 수 없이 많다. 1세대 제자인 김동길, 김용준, 안병무, 문익환, 장준하 등은 원로가 되어 있거나 고인이 됐다. 김지하, 한완상, 한승헌, 김성수 등은 2, 3세대 제자들이다.

1901년 20세기가 시작되는 첫해에 태어나서 해방, 6.25, 4.19, 5.16 등 민족의 변혁과 수난을 체험하며 격동의 역사 한복판에 서서 씨알의 근본을 찾아나선 그의 큰 사상을 짧은 지면에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다만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몇가지 기억을 되살려 보려 한다. 야외에 소풍을 모시고 나갔을 때 흔히 우리들이 지나쳐 버리던 하찮은 들꽃 앞에 서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한참동안 감상하던 선생의 모습을 기억한다. 예쁜 꽃만 찾아 즐거워하는 우리와는 달리 들꽃, 들풀들의 근본 생명, 그 씨앗에 초점을 맞추는 삶이었다.

민중(民衆)이라는 한문을 씨알이라는 한글로 표현한 것은 1950년대에 유영모 선생으로부터 유래되었지만 함선생은 민중을 대신한 말을 넘어서 그 언어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알의 “ㅇ”은 극대 혹은 초월적인 하늘을 표시하는 것이며, “·”은 극소 혹은 내재적인 하늘 곧 자아를 표시하는 것이고, “ㄹ”은 생명을 표시하는 것이며, 씨앗과 알은 모든 생명의 시작이며 모든 생명체 자람의 마지막 결실이라는 것이다.


씨알이 자기를 내세우거나 누구와 자리다툼하거나 밖으로 나가면, 햇빛에 타 죽을 뿐이다. 예수의 씨알은 부활한 씨알이지 타죽은 씨알이 아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만 대지의 주인이 되듯 생명활동을 할 수 있고, 전체의 삶과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끊임없이 작은 자아를 죽이고 자신의 욕심과 집착을 끊음으로서만 자유롭고 진실한 삶을 살수 있다. 씨알사상은 “나”에 중점을 두고 있다.

LA에 계실 때 설교 때문에 여러 교회로 모시고 다녔는데, 몇몇 목사들이 몇 계단 안되는 높이의 강단에 오를 때 부축해 드릴 때마다 팔을 힘차게 뿌리치는 장면을 보곤 했다. 어느 목사는 예배후 “선생님 화 나셨나?”하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 “자기 걱정 안하고 남의 걱정만 하다 나라가 망한다”는 그 말씀이 지금도 가슴속에 저려 있다.

민족, 세계, 종교 어떤 것을 말하건 논의의 출발점은 “나”이다. 현실 문제의 뿌리도 “나”에 있다. 삶의 원리를 “스스로 함”으로 보는 선생님 사상에는 “나”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과제가 놓여 있다. 나를 파고듦으로써 대자연의 생명과 통하고 결국 내가 전체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풀과 나무가 삶에 대한 회의와 좌절을 모르듯 씨알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날 그날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들 삶에서 삶의 용기와 활력을 얻을 수 있다.

1953년 선생은 “대선언”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새롭게 동터오르는 미래의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열망하면서 스스로 이단자가 되리라고 선언한다. “종교는 믿는 자 만의 종교가 아니다. 시대전체 사회전체의 종교다. 종교로서 구원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본래 어느 종교나, 전당을 짓는 것은 그 역사와 마지막 계단이다. 전당을 굉장하게 짓는 것은 종교가 먹을 것을 다 먹고 죽는 누에 모양으로 제 감옥을 쌓음이요, 제 묘혈을 팜이다. 내부에 생명이 있어 솟는 때에 종교는 성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85년 선생을 모시고 퀘이커 세계대회에 갔는데, 세계대표들이 인사하고 저마다 처음 묻는 말이 “오늘은 몇날째 사는 날 입니까?”였다. 선생님이 사신 날수가 3만2,106일요, 햇수로 88년이다. 10일 LA에서 탄신 100주년 기념 강연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하며 모든 사람을 귀히 여기는 그의 정신이 다인종이 몰려 사는 LA 한인 이민생활의 정신적 길잡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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