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곤경에 빠진 DJ

2001-03-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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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혁 (USC 정치학 교수)

김대중 대통령의 입지가 난처하게 됐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부시 행정부측에 자신의 햇볕정책을 이해시키고 지지를 얻어내려던 본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상회담 후 나온 공식 발표를 보면 양쪽이 서로 입장을 이해하고 조율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DJ의 유화 정책에 부시가 반대의사를 표시했다는 게 이번 회담의 골자인 것 같다.

지난 번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미사일 방어체제(NMD)와 탄도 미사일 반대 조약(ABM)과 관련, 러시아 편을 든 것은 미국측에 햇볕정책을 지지해 달라는 압력용이었던 것 같은데 부시 행정부가 강력히 반발하고 나오는 바람에 나중에 유감 표시로 얼버무리는 등 오히려 역효과만 났다. DJ가 지나치게 클린턴등 민주당 정권에 가깝다 보니 부시나 공화당 쪽과는 인맥이 없어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현 부시 행정부내 국무부와 국방부간에 강온파 대립이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나 부시팀은 근본적으로 클린턴보다는 강경파가 많아 이는 정도의 차라고 본다.
그러나 저러나 부시가 아직까지 북한을 “신뢰할 수 없는 나라”라고 규정하고 사사건건 검증을 고집하고 나올 경우 DJ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에 놓일 것 같다. 북한이 이같은 미국측 입장을 수용할 리 없기 때문이다. 미국 편을 들자니 지금까지 정책 기조인 햇볕정책을 포기해야 하고 그렇다고 미국과 등을 돌리면서까지 대북 유화노선을 걸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모두 강경으로 선회하는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DJ가 이룩한 최대 업적이 남북화해인데 이 마저 무너질 경우 DJ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지 않아도 DJ는 국내적으로도 어려운 형편이다. 경제는 회복 조짐을 보이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취약한데다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아 레임덕 현상이 벌써 벌어지고 있다. 자민련에 의원 꿔주기까지 해가며 다수의석을 지키려다 스타일을 구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국정을 펴나갈 수 없는 약체 정권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다. 지난 3년간 포용력 있는 정치로 야당을 끌어안지 못하고 자민련에 끌려 다니는 바람에 국민의 지지를 잃고 말았다.

부시 행정부가 상대적으로 강경노선을 걷는다 해도 94년 이래 지속되어온 평화 기조를 깨지는 못할 것이다. 부시 행정부 자체가 아직 뚜렷한 대북 정책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다. 단지 협상의 속도가 좀 늦춰지고 국교 정상화와 경제 원조 대가로 검증된 군축등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미국과 북한 관계가 갑자기 악화되지는 않겠지만 종전처럼 북한의 요구를 일방적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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