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따르는 정치인이 있는 것 같다. 조지 W 부시가 그렇다. 숙명론을 펴자는 것은 아니지만 선거 과정은 물론이고 백악관에 들어선 이후의 부시를 보면 ‘운이 따라 준다’는 느낌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부시가 처음 취임했을 때 전망은 대체로 신통치 않았다. ‘소수의 대통령’이라는 핸디캡 때문이다. 전임 클린턴의 인기가 퇴임 직전까지 유례없이 높았던 것도 한 이유다. 새 대통령은 아무래도 전임자와 자주 비교되게 마련인데 사상 최장의 호경기를 이끈 클린턴의 화려한 명성에 눌려 지낼 것으로 보여서였다.
클린턴이 연방상원이 된 힐러리와 함께 퇴임후 살 집을 워싱턴 D.C.에도 마련하자 부시시대에도 ‘워싱턴 정가의 스타는 여전히 클린턴 부부가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그 예상은 부분적으로 맞기는 맞았다. 부시 행정부 출범 한달이 훨씬 지나도록 새 대통령이 아닌 클린턴 부부가 언론의 각광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클린턴에게 쏟아진 언론의 관심은 그러나 임기 막판에 터진 추문 때문이다. 이른바 사면 스캔들이 날로 확산되면서 클린턴은 마침내 민주당도 등을 돌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힐러리의 정치 생명도 위태롭게 됐다. 부시의 인기는 반대로 치솟았다. 여기까지는 순전히 운으로 볼 수 있다. 전임자의 부도덕한 행실이 가져다 준 정치적 반사이익 일 뿐이라는 지적이 가능해서다.
부시의 지지도는 요즘 65%까지 치솟았다. ‘소수의 대통령’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이 수준의 지지율 확보는 그러나 ‘운이 좋아서’라는 식으로만 볼수는 없다. 운도 운이지만 실력이 뒤따라야 한다. 운이, 다른 말로 하면 기회가 왔을 때 이를 정치적 호재로 활용해 지지기반을 확산시키는 정치적 리더십이 없으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운이 따르는 정치인이라는 점에서는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도 빠질수 없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자체가 어찌보면 천운이었다. 당시의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한가지만 삐끗해도 김대중 대통령 탄생은 있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왜 IMF사태가 그 타이밍에 찾아왔을까. 당시의 상황을 하나 하나 돌이켜 보면 DJ의 당선에는 운이 따랐다는 표현밖에 나올 수가 없다.
IMF사태와 함께 전임 YS의 무능과 문민정부의 부패상황이 폭로되면서 상대적으로 DJ의 주가는 높아갔다. 정치적 반사 이익이 컸다. ‘소수의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도 불식케 된 것이다. 이후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DJ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국정을 펴 나갔다.
요즘들어서 상황이 묘하게 전개되고 있다. 한국 언론의 초점이 YS등 전직 대통령들에게 모아지면서 부시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고 있는 것이다. YS의 회고록이 날개돋힌 듯 팔리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전두환 시절이 차라리 낫다는 말이 그것도 광주지역에서 나돌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와 함께 반 DJ 정서가 날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해 부시 미대통령과 대좌했다. 북한 문제가 주 논의 상황이다. 김대통령으로서는 그동안 추진해온 햇볕정책을 부시에게 설명해 협력을 구하는 게 이번 방문의 주 목적인 것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일이 꼬이고 있는 것 같다. 부시가 DJ의 햇볕정책에 크레딧을 주지 않는 반응을 보여서다. ‘평화정착을 위한 김대중 대통령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외교 수사를 구사하면서 부시는 한마디로 북한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이고 이런 북한과 당분간 대화도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DJ는 이번 정상회담에 상당히 많은 기대를 건 듯 하다. ‘일석삼조’(一石三鳥)의 기대다. ‘부시로부터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어낼 경우 김정일의 서울 답방도 쉽게 이루어진다. 이는 민심 관리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된다. 대치 상황의 정국 타파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후 국정 관리는 탄탄대로를 걷게된다’- 이런 계산이 깔린 게 DJ의 워싱턴 방문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부시로 부터 훈수를 듣는 형국이 된 셈이다. 어쩐지 운이 따라주지 않는 느낌이다.
운이 따른다는 것은 축복이 따른다는 의미다. 국가 지도자에게 축복이 쏟아질 때 그 축복은 전 국민의 축복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실패한 전임 대통령들’이 새삼 각광을 받는다는 것은 적색 경보다. 요즘 DJ에게는 왜 운이 따라주지 않을까. 한번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