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시당하는(?) 지구

2001-03-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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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에서 인기 있는 만화책 ‘광수 생각’에 이런 장면이 있다. 정신과 병원을 찾아간 주인공이 울면서 의사에게 말했다.

"난 죽고 싶어요! 매일 무시만 당하고 살아요. 친구들에게 무시당하고 집에서도 무시당하고 직장에서도 무시당하고 심지어 지나가는 개들마저 날 무시해요"

그러자 의사는 냉담하게 말했다. "다음 사람!"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한국 학부모 여론조사에서 ‘자녀를 대학에 보내려는 이유’를 물었더니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라는 답변이 6.6%로 4위를 차지했다.

무시당했다고 살인까지 한 케이스도 있다. 얼마전 대낮 남가주 대형 샤핑몰 주차장에서 한 청년이 남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66세 할머니를 칼로 마구 찔러 죽였다. 할머니의 머세데스 벤츠 승용차를 카재킹 하려 했는데 할머니가 자기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청년이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이유였다.

강타자 게리 셰필드가 "무시당했다"는 이유로 트레이드를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LA다저스 분위기가 스프링캠프 벽두부터 가라앉았다. 1,000만달러대 연봉을 받는 선수가 ‘더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것이 ‘무시당했다’고 느낄 객관적인 사유에 해당되는지는 의문이지만 본인이 무시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할말은 없다.

삼일절인 1일 아침 장마처럼 계속되던 남가주의 비가 그치고 맑게 개인 날씨를 볼 수 있었다. 주말께 다시 비가 온다는 예보지만 모처럼 모습을 드러낸 해님이 반가울 정도로 올 겨울엔 비가 많이 왔다. 비의 고장 시애틀보다도 강우량이 많다니…

반대로 시애틀에서는 강진이 발생했다. LA만큼 지진에 면역이 된 도시가 아니다보니 많이들 놀랐을 것이 틀림없다. LA와 시애틀이 뒤바뀐 셈이다. 서울, 아니 한국에서는 올 겨울눈이 지겹게도 많이 온 모양이다. 한국에서 다니러온 중년의 친지는 자신의 생전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해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 모든 현상이 기상 이변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무언가 의미가 담긴 것 같아 심상치 않다. 지구가 우리 인간들에게 "너희들 나를 더 이상 ‘무시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고 아무리 순한 사람도 무시하면 화를 내게 마련이다.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에 우리 인간들이 온갖 생채기를 내고 매연을 뿜어대도 묵묵히 참고 관용해 주던 지구가 이제 더 이상 무시당하고 살수는 없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난 세기 인류는 지구에 대해 무던히도 가혹행위를 했다. 지난 100년간 지구상의 이산화탄소 배출은 15~20%가 증가했고 그 결과 평균기온이 섭씨 0.5도 상승했으며 해수면이 23센티미터 상승했다.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100년 후에는 지구 평균기온이 4.5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지구가 그때까지 ‘무시당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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