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초 아라비아의 예언자 마호멧이 어느날 아침명상에 잠겼다. 옆에서는 고양이가 마호멧의 넓은 소맷자락 위에 앉아 따뜻한 아침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하인이 들어와 손님이 왔다는 말을 전했다. 마호멧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보니 고양이가 그의 소매 위에서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마호멧은 하인에게 가위를 가져오게 한후 고양이 앉은 주위로 소맷자락을 둥글게 잘라내고 일어나니 고양이는 아무 눈치도 못채고 단잠을 즐겼다. 미물인 고양이에게마저 지극한 마호멧의 인품을 전하는 일화이다.
7세기의 성인을 주인으로 둔 고양이와 21세기 미국의 고양이중 누가 더 행복할까. 애완동물의 지위가 너무 높아지고 있어서 해보는 상상이다. 비교우위에 따른 행복감을 따진다면 마호멧의 고양이가 되겠지만, 보편적 행복지수를 생각한다면 단연 요즘의 미국 고양이들이다.
‘미물’과 ‘만물의 영장’이라는 넘을수 없는 신분차이를 유지하던 애완동물과 사람의 사이가 ‘반려자’ 관계로 좁혀지고 있다. 진보성향이 강한 웨스트할리웃 같은 도시는 애완동물의 주인을 더 이상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보호자’로 지칭하기로 며칠전 법을 바꾸었다.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겠다는 취지이다.
“이러다가는 강아지 홀로 집에 두고 외출하는게 ‘강아지 학대’가 되는 날도 멀지 않겠어. 좀 지나친 것 아닌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것은 한인들만이 아니다. 이런 대다수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인권이 소중하다면 동물의 권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1세기 전만해도 유색인종의 권리, 여성의 권리를 누가 상상이나 했는가. 이제는 동물이 권리를 존중받을 차례다”- 동물권리 옹호론자들은 의식의 전환까지 들고 나오고 있다.
무엇이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 주는가. 무엇이 동물의 지위를 이렇게 높여준 것일까. 바로 사람들 개개인의 마음속에 차지한 애완동물의 비중이다. 애완동물의 주인을 ‘보호자’라고 시조례로 못박은 곳은 두 도시밖에 안되지만, 실제에 있어서 개나 고양이가 ‘아들’이고 ‘딸’인 집은 미국에 너무나 많다.‘자식’에게 아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애완동물 비즈니스가 붐을 이루는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이다.
미국은 지금 애완동물의 황금시대를 맞고 있다. 우선 수적으로도 애완동물이 이렇게 많았던 적은 없었다고 한다. 지난 96년 통계를 보면 개가 5,300만마리, 고양이가 5,600만마리, 새가 1,260만마리다. 대표적 3종류만을 두고 봐도 전국민 2명중 한명은 애완동물을 가지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게다가 그 동물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보니 애완동물 의료비용으로만 지난 98년 111억달러가 지출되었다고 한다. 지구상에는 국가 연예산이 100억달러가 못되는 나라가 수두룩하다.
동물 비즈니스가 노다지로 인식되면서 하버드, 조지타운 같은 고고한 대학들이 동물법 전공을 만들었고, 제약회사들은 따로 연구팀을 두고 동물용 암, 심장병, 폐질환 치료제, 비만예방을 위한 식욕억제제등을 개발하고 있다. 돈이 몰리니 의식의 전환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몇년전 가깝게 지내던 백인친구가 있었다. 미혼의 30대 여교사로 개 두 마리를 데리고 혼자 살았는데 그중 한 마리가 암진단을 받았다. 그러자 별로 돈도 많지 않은 그가 주저없이 한번에 100달러씩 하는 방사선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었다. “개에게 100달러짜리 치료라니…”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개에 대한 그의 사랑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가족도 없고 개들이 자식이자 친구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프리카나 북한 어린이들의 텅 빈 위장을 생각하면 미국 애완동물들의 호사는 죄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애완동물의 수가 늘고, 집안에서 반 사람대접을 받는 현상을 단순히 호사로만 돌릴 일도 아니다. 그 동물들이 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 가정이 깨어지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람의 빈자리를 동물이 메워주고 있다.
몸을 위한 일용할 양식이 있고나면 그 다음 필요한 것이 감정의 일용할 양식이다. 매일 사랑을 주고, 쓰다듬고, 따뜻한 체온을 느낄 대상이 있어야 사람은 건강을 유지한다.‘애완동물 황금시대’는 씁쓸한 시대다. 그만큼 외로운 마음들이 많다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