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1세기 로빈슨 크루소

2001-02-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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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옥<수필가·엔지니어>

영화 ‘캐스트 어웨이’가 연초에 흥행 1순위를 기록했다. 그래서이기도 하지만, 탐 행크스를 좋아하고 그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는 믿을 수 있기에 개봉하고 얼마 안되어 보았다. 탐 행크스의 연기는 이번에도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소재도 좋았다. 그런데 보고 나서 ‘참 좋았다’하는 마음이 아니고 왠지 허전하고 쓸쓸했다.

아마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다고 기억된다.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던 게. 솔직히, 그때 그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던 것 같지는 않다. ‘빨간 머리 앤’ ‘소공녀’ ‘작은아씨들’들은 부분적으로나마 또렷이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는데, ‘로빈슨 크루소’는 줄거리만 생각나는 것으로 보아서. 그래서 35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았다. 읽어나가면서 ‘캐스트 어웨이’를 보고 왜 허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은 ‘더 빨리, 더 많이’를 추종하는 21세기에 걸맞게 페덱스 회사의 능률 전문가. 세계 각국에 퍼져있는 지사에 다니며 능률을 올리는 자문을 하던 중 출장 길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를 당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태평양의 한 무인도에 표류해서 4년 동안 혼자 살게된다. 코코넛과 생선으로 연명을 하며. 그곳에서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유일한 것은 그가 출장 길에 오르기 직전에 약혼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회중시계. 그 시계에 끼워있는 그녀의 사진을 늘 보며 위안을 받고 희망을 끌어올린다. 그녀를 꼭 다시 보고싶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 그러나 막상 4년 후에 구출되어 돌아왔을 때, 약혼녀는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다. 그는 무인도에 표류했을 때보다 더 큰 외로움에 빠진다. 무인도에 표류해 의식을 찾은 순간, ‘아무도 없소?’라고 외치며 사람을 찾는 것으로 무인도 생활을 시작한 그가,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의지 삼아 무인도 생활을 버티어 내지만, 끝내는 그 사람에 의해 큰 실망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암시로 영화는 끝난다.


1659년 9월30일,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표류해 의식을 차렸을 때 제일 처음 한 일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는 일이었다. 생명을 구해주신 절대자에게. 19세에 가출을 해 여기저기 배를 타고 떠돌이 생활을 하며 살아온 그에게 특별한 종교나 신앙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그렇게 감사의 의식으로 무인도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우선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낱낱이 분석해 본다. 같은 상황을 두 개의 관점에서. 피해자라는 부정적인 관점과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즉, ‘나는 아무도 살지 않는, 절망적인 무인도에 버려졌다’를 다시 긍정적인 관점에서 ‘그러나 나는 살아있지 않은가’라고 생각을 돌린다. ‘내 몸을 가릴 수 있는 옷 한 벌도 제대로 없다’를 ‘그러나 이곳은 날씨가 더워 옷이 있다해도 거의 입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돌리고.... 무인도 생활을 하며 비로소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깊이 성찰하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게 된다. 그리고 인내와 슬기로 무인도에서 삶터를 개척해 나간다. 염소를 길들여 젖을 짜 먹고, 옥수수 밭을 일구고, 앵무새에게 말을 가르쳐 말동무로 삼으며.... 28년 후, 그는 55세의 나이에 새사람이 되어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간다.

‘캐스트 어웨이’의 21세기 크루소는 참담한 무인도 생활을 스스로 끝내기 위해 자신의 목을 달 십자가를 만든다. 17세기의 크루소는 감사를 드리기 위해, 자신이 의식을 회복했던 바로 그 자리에 십자가를 만들어 세운다. 21세기의 크루소는 놓여진 상황을 비참함으로밖에 보지 못한다. ‘내가 왜?’에 사로잡혀 원망이 가득하다. 17세기의 크루소는 ‘이 못되고 보잘 것 없는 내가 어떻게’의 겸손함으로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산다. 21세기의 크루소는 구출되고 나서도 감사할 줄 모른다. 그가 4년만에 구출된 게 참으로 다행이다. 그게 그의 한계였을 테니까. 17세기의 크루소는 28년 후에야 무인도를 떠나게 되지만, 자신의 구출이 절대자에 의해서 계획된 것이라는 것을 믿고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21세기의 크루소를 보고 왜 허전하고 쓸쓸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영화에 무슨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우리가, 아니 내가, 바로 저 현대판 크루소는 아닌지 하는 두려움 내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때문이었으리라. 감사보다는 원망을 앞세우기 바쁘고, 참을성 없고,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는 21세기의 우리네 속성을 들여다본데서 오는 쓸쓸함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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