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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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은 이’ 되게 하소서

2001-02-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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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주<수필가>

아침을 맞으면 드려야 할 기도가 참으로 많습니다. 할 기도가 너무 많다 보니 무슨 기도부터 해야 할지 몰라, 우선 지나간 저의 반생을 돌아보았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저는 친구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 있으면 기꺼이 주는 순하고 착한 아이였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비가 오면 우산도 받지 않고 하염없이 걸으면서 수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 가운데는 변호사도 있었습니다. 여고 시절엔 봄이면 으레 겪는 ‘보릿고개’의 참담한 현실을 보면서, 농촌계몽 운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대학에서 신문학을 공부했던 것도 이러한 의식의 연장이었습니다. 펜의 힘으로 사회정의를 지키고, 언론을 통해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을 이끄는 명경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자 그 아기들이 저의 우주가 되었습니다. 저는 아기들이 ‘작은 아씨들’의 아씨들처럼, ‘소공녀’처럼, ‘빨강머리 앤’처럼, ‘파레아나의 편지’의 주인공 ‘파레아나 같은 소녀’들로 자라기를 소망했습니다. 무엇이든 혹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소망을 ‘이룬 셈치고’ 절망하지 않고 꿋꿋이 견뎌내는 소공녀나 받고 싶은 선물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자기 대신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은 기뻐할 테니 나도 기쁘다는 ‘기쁨의 게임’을 스스로 하면서 마음을 다스려 가는 어린 소녀들의 맑고 힘있는 세계에 담긴 삶의 지혜에 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왔을 때 저는 아직 생기발랄한 30대였습니다. 우리 집 마당이 다른 집의 정결함에 뒤질세라 손끝이 갈라지도록 마당의 풀을 깎고, 낙엽을 긁고, 꽃을 가꾸었습니다. 이웃들에게는 한국음식을 대접하면서 어떻게든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품위를 지키려고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며칠 전 둘째 아이와 어느 상점 앞에 서 있는데, 한 흑인 소년이 학교에서 팔라고 준 초컬릿을 내밀었습니다. 옷차림도 지저분하고 한 눈에도 가난한 아이였습니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냉정한 목소리로 "얘, 그런 것 나는 필요 없어. 저리 가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비실비실 뒷걸음질을 치며 실망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때 둘째 아이가 얼마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소년은 학교에서 받으라는 값보다는 조금 더 붙인 엉뚱한 가격을 말했습니다. 둘째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돈을 주었습니다. 소년이 물러간 후, 둘째 아이는 "불쌍하잖아"하고 저를 마치 낯선 사람처럼 처다 보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몹시 부끄러워졌습니다. 아이들을 키울 땐 사랑을 가르치고, 정의를 말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역설했던 제가 한 흑인 소년의 초라한 모습을 경멸하고 도움의 손길을 외면하는, 때묻은 어른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깊이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옛날의 저’로 돌아가고 싶다는 꿈을 꾸어봅니다. 그때처럼 착하고, 이웃과 작은 사랑이라도 나누면서 필요한 사람에게는 따뜻한 벗이 되어주고,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 향기로운 한 잔의 커피 혹은 찰라처럼 스치는 인연에도 행복해 하는 사람. 언제나 신념의 마력을 잊지 않고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하고 창조해 가는 사람. 아, 아, 역시 점점 소망이 불어나기 시작합니다.

정정합니다. 오늘 아침엔 오로지 한 가지만 기도하겠습니다. "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겸손하며, 따뜻하고 인정이 넘치는 그런 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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