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 남성과 발렌타인스데이

2001-02-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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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칼럼

▶ 이 철<주필>

발렌타인스데이에 아내에게 장미꽃을 보내본 적이 있다는 나이든 남자들과 나눈 이야기다.

“그래 부인의 반응이 어떻습디까? 나이 먹은 사람도 발렌타인스데이에 꽃을 보내 볼 만합니까?”

“무슨 소리. 핀잔만 받았어. 안하던 짓을 갑자기 왜 하느냐구. 꽃 살 돈 있으면 현찰로 주든가 밖에 나가 저녁을 사라는 거야”


자신도 좀 민망스러워지더라는 것이다. 모처럼 용기를 내 해 본 것인데 받아들이는 쪽에서 소화를 못하니까 나이 들어 좀 로맨틱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실천에 옮기기가 힘들다고 했다.

여성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건 여성을 모르는 소리”라고 말한다. 꽃 받은 부인은 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겉으로 한번 해 본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 주변에 있는 나이 든 남성 여러 명에게 다시 확인해 본 결과 부인들이 발렌타인스데이에 꽃 받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어색해 하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선수끼리 뭐 그럴 필요 있느냐”는 표정이라는 것이 그분들의 소감이다.

야구에서 피처가 아무리 스트라이크 볼을 던져도 캐처가 잘 받아주지 못하면 스트라이크가 되지 못하는 법이다. 던지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가 호흡이 맞아야 스트라이크가 터지게 되어 있다.

우리 세대는 ‘발렌타인스데이’가 무엇을 하는 날인지 본 적이 없다. ‘발렌타인스데이’는 우리 문화가 아니다. 한국인들은 한국인 나름대로 남녀간에 애정을 표시하는 바디 랭귀지가 있다. 지난 해 화제를 모았던 TV 연속극 ‘허준’을 보면 한국적인 애정표현이 얼마나 은은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 남성들은 아내에게 끊임없이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야 된다. 만약 “I love you” 소리를 좀 게을리 하면 애정이 식은 것으로 간주된다.

발렌타인스데이의 시범을 보이려면 적어도 레이건 전대통령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가 아내 낸시에게 보낸 발렌타인스데이 카드를 보면 구구절절 애정이 넘쳐 있다.


“당신은 나의 행복 그 자체요. 내가 당신을 스윗하트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신처럼 달콤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오”

“나에게는 매일 매일이 발렌타인스데이요.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하는지 아오? 당신은 항상 당신답기 때문이오”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배우자를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당신을 또 택할 것이오. 당신과의 삶은 정말 후회가 없었소”

이 정도의 사랑 고백 내용이 담긴 카드를 넣어 장미꽃을 보내야지 남들이 보낸다고 해서 비싼 장미만 덜렁 부인에게 보내봤자 ‘쓸 데 없는 짓 한다’고 놀림받기 마련이다. 선물에는 마음이 담겨져 있어야 하는데 마음 표시는 없고 비싼 꽃만 배달되니 곰에 웅담 빠진 식이다.

지난 해 출판된 레이건 대통령 서한집을 보면 백악관 시절 부인 낸시 여사에게 “I love you”를 열 번이나 써서 보낸 카드가 있다. 낸시는 지금 이 카드를 사진틀에 넣어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쳐다보는 것으로 위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부인에게 “I love you”를 아침저녁 주문처럼 외어대는 미국 남성들의 이혼율이 왜 그렇게 높은가. 이건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한집 건너 이혼이다. 요즘 한국에서 발렌타인스데이에 젊은이들이 야단법석이라지만 좀 걱정스럽다. 미국 문화를 무조건 베끼다 보면 이혼율도 높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를 위해 한국식 발렌타인스데이가 있었으면 한다. 단오날이 제일 어울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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