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삶을 밝혀준 ‘연애편지 ‘

2001-02-1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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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이륙 (호놀룰루)

“극기는 인격의 도야다”

이 말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느 남자 고등학생이 버스간에서 준 쪽지의 글이다. 43년이 지난 지금도 어려움이 닥치고 힘이 들면 이름 모를 까까 중머리 고등학교 학생복 입은 그 학생을 떠올린다.

시골로 시집을 간 언니 집을 찾아갔다 오면서 버스를 지루하게 기다리다 막 버스를 타고 앉으려 하니 어느 남학생이 얼른 올라와서 내게 종이 쪽지를 주고 떠났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 옆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쳐다보면서 마음속으로 연애 편지겠지 하며 조금은 기대감을 가지고 가만히 펴 보았다. “극기는 인격의 도야다” 써 있지 않는가. 황당한 마음이었다. 나는 아름답게 쓰여진 달콤한 속삭임이겠지 기대하였던 것이다. ‘누구야, 건방지게 저나 잘하지 누굴 훈계를 해’ 하는 마음으로 버스 바닥에 종이 쪽지를 버렸지만 그 글귀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평생 분신처럼, 스승처럼 따라 다니고 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 너를 지켜본다, 너 잘할 수 있지” 하며 귀에다 속삭인다. 죄를 지으려할 때, 돈을 속이고 거짓말이라도 할라치면 내 뒤에 서 있다. 특히 내가 잘못해서 내가 사과를 해야 할 적에는 물론 내가 생각하기에 분명히 옳은 말을 했고 상대방이 잘못했는데도 극기는 나더러 “네가 참아, 네가 먼저 잘못했다고 해”하면서 등을 떼미는 것이었다. 나는 등을 떼밀려 할 수 없이 먼저 사과를 하고 나서는 몇날 며칠을 머리 싸매면서 “아닌데, 내가 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하며 분해하곤 했다.


오늘도 예배를 드리고 나서 어떤 분이 내게 부탁의 말을 하기에 그것보다 먼저 이것을 하여야 하지 않나 하며, 내 의견을 말했더니, 그 분은 목사님에게 가서 말을 하고, 목사님은 나를 불러서 왜 도와주지 못하느냐고 잔뜩 훈계를 하는 것이었다. 내게 질문을 해온 분에게 가서 “내 대답이 화나고 섭섭했어”물었더니 그분 대답이 깔보았다는 것이다. 또 그 놈의 극기는 “네가 미안하다고 해”하며 착 달라붙어서 재촉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미안해”하고 나니, 옆에 있던 분들이 “아니 나도 옆에서 있었는데 화날 말도 아니고 목사님에게 이를 말도 아닌데 왜 바보처럼 잘못했다고 해”한다.

어느 분의 간증에 바람에게도 말하고 꽃에게도 말하고 구름에게도 말하고 나무에게도 말을 하며 산다고 하였다. 그들은 있는 것만 받고 가진 것만 보여 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자연에서 하나님 창조의 섭리와 진실을 보듯 모두가 겸허한 마음을 가질 때 한인사회에서 싸움과 소송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내 삶을 보석으로 만들어 주는 내 분신 극기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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