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2000-12-30 (토) 12:00:00
친구인 소설가 P와 한인타운에서 만났다. 이름도 거창한 ‘송구영신 의식’을 위해서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사우나에서의 등 밀기를 말한다. 그녀도 나도 한가하게 사우나에서 마사지받고 찜질방에서 휴식을 취하는 팔자 좋은 부류는 진작에 아니었다. 골치 아팠던 한해를 훠이 훠이 털어 보내고 산뜻한 새해를 맞자며 생각해낸 것이 목욕이라는 방법이었을 뿐이었다. 가끔 운동하러 사우나에 드나들어도 수영후의 샤워 정도였었다. 요즘엔 외국인들도 한인운영의 사우나에서, 때 밀기에 맛들여 규칙적으로 서비스를 받는 광경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공개된 장소에서 남에게 몸을 맡기고 평상에 누워있는 모습은, 나의 정서로는 아직 거북하므로 혼자서 대충 씻는 편이었다. 친구와 번갈아 등을 밀면서 미처 손이 닿지 않던 곳까지 묵은 때를 벗겨내니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등을 밀던 친구가 덕담도 한마디 곁들인다. "때와 함께 속상했던 일들도 다 떨어져 나가라."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과의 결별, 두 번의 자동차 사고,남편의 사업에서 발생한 소송건, 세금문제, 정신적 지주였던 목사님의 소천, 노부모님의 병환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문제의 연속 속에서 잘 견디고 살아 남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그 모든 문제들이 내가 머리를 써서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절대자에게 매달려 기도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참아내니까 숨막히던 상황이 조금씩 해결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 없던 일로 되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가면서 상황을 푸는 나의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문제에 대한 열쇠도 생기는 거였다. 결국 나의 맘 먹기에 따라 같은 문제가 지옥으로 느껴졌다가 천국도 되었다가 하는 식이었다.
평생 큰 어려움이라고는 없이 순탄하게 산 편인 나는, 솔직히 현실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아니면 누군가가 매직의 손으로 순식간에 해결해 줄 것을 바랬다. 하지만 호락호락한 문제는 없었다. 사실 쉽게 풀린다면 문제로 여기지도 않았을 터이지만. 그런 일들이 있을 것을 미리 알았는지 연초에 교회에서 각가정 마다 준 성경말씀 한 귀절을 거실 벽에 붙여 놓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나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는 시편의 구절을 읽고 또 읽으며 얼마나 위안을 받고 신기해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인생은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고난을 극복해 가는 여정’의 연속일 것이다. 살수록 다양하고 더 어려운 난이도의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날들이 없다고는 단언하지 못한다. 생각 없이 지나쳐서 그렇지 헤아려 보면 많은 즐거운 순간들이 인생의 여정 속엔 있다. 소설가 P와 가졌던 연말의 등 밀기와 목욕후의 시원한 냉면 맛은 그 중 한가지로 기억 될 것이다. 평소 속내를 다 보이며 살던 그녀에게 이제 나의 알몸까지 보였으니, 볼 것 안볼 것 다 본 그녀의 입을 막는 길은 오래도록 친구로 남는 길뿐이다. 올해 단단히 예비시험을 치뤄 두었으니 앞으로 다가올 어떤 어려운 시험도 쉽게 날려버릴 수 있을 거란 기대로 마음이 설렌다. 새해에는 나에게, 내 친구에게, 아니 모든 이들에게 건강과 평안이 넘치기를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