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른 말의 자연‘도퇴’

2000-11-0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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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창진<라미라다>

신문, 잡지, TV와 라디오 방송, 일반 서적 등에서 요즘 와서 부쩍 말과 문장의 잘못들이 눈과 귀에 띈다.

얼마 전 어느 젊은 아나운서는 어떤 저명 인사의 장례식에 수많은 하객(賀客)이 모였다고 보도하고 있었는데 의식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면, 말의 뜻을 그냥 어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이르는 말로 오해하고 저지른 잘못인 것 같았다. 이런 실수는 한문을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일로 차라리 애교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제법 유명한 수필가이며 여러 권의 저술까지 있는 분들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 오용을 하는데는 할 말을 잊게 된다.

‘기적’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우리말에 들어 온지가 얼마쯤 됐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말은 신약 성서와 함께 우리와 친숙해졌으며 예수의 행적에 드러낸 여러가지의 기적, 예컨대 맹물이 변화하여 좋은 포도주가 되게 한다든지, 죽은 라자로를 살렸으며 물위를 걸어가고 5병2어로 5000명 군중을 배불리 먹였다는 등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을 불러 기적이라 하는 줄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수필가는 어떤 우연한 지극히 드물다고 생각되는 만남을 ‘기적’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 경우엔 기연(奇緣)이 적합한 말이다.


한국에서 온 어느 문학잡지에(본국 문단에서 어느 정도의 평가를 받는 잡지인지는 알수없다) 문인단체의 이사장이라는 역시 문인이 쓴 글이 ‘권두언’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었는데 그 문장의 조잡성은 말할수 없고 사용한 용어들 마저 억지스러움이 곳곳에 나타나 있었는데 심지어는 ‘자연도퇴’라는 말이 있었다. 당연히 ‘자연도태’일 것이라는 생각에 사전을 보니 ‘자연도퇴’란 말은 있지도 않은 신조어였다. 추리하건대 한국에서 ‘기업퇴출’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는 시절이었기로 ‘自然淘汰’를 ‘自然倒退’ 쯤으로 신조어를 만들어 썼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동거동락’이라는 말을 하지를 않나, 아들이 뉴욕으로 공부하러 떠나가는 비행장에 ‘마중’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지를 않나, 자못 경쟁적으로 신조어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긴 원래 ‘동고동락’(同苦同樂)이라는 말은 괴로움도 즐거움도 함께 한다는 뜻을 가진 말인데 요즘은 시대가 하도 달라져서 괴로움 같은 것은 할 필요도 없고 즐거움만 즐기려고 결혼도 하는 세태라 ‘동거동락’(同居同樂)으로 함께 살아가면서 함께 즐기자는 뜻의 말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문란한 언어의 남용, 오용은 결코 건전한 사회에서 만연돼서는 안될 현상이라는 생각이다. 글쓰는 분들이 제대로 된 ‘국어사전’을 곁에 두고 조금 소원했던 말을 쓰고 싶을 때에는 그 말을 찾아 말뜻을 챙겨 본 후에 쓰든지 말든지 하면 될 일이다. 그 간단한 수속을 밟지 않음으로써 말의 혼란과 오염이 일어난다. 버나드 쇼라는 영국 문인은 이런 말을 했다.

“영국인은 그 입을 열어 말을 하기만 하면 그 신분이 들어 나서 사람들의 경멸을 자초하는 일이 많다” 애써 글을 써서 경멸을 받아서야 될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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