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양반의 후예

2000-11-0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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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포오먼 칼럼

▶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교수)

한인 2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내가 짐을 나르는 블루칼라 직업을 가졌다고 하면 나를 대하는 태도가 금방 변한다" 한인 친구는 미국에서 자라면서 겪었던 인종차별보다 훨씬 심한 직업차별을 한국사람들로부터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사람과 미국사람이 직업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기에 젊은 청년의 말에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양반은 손을 더럽히면서 일하지 않는다"는 유교문화의 영향 때문인지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 블루칼라 직업을 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존경을 받는 직업을 얻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누가 나에게 어떻게 하면 한국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까요 하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다음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성취하라고 말하겠다. 첫째, 의사, 변호사, 교수가 되라. 이 세 가지 중에 한가지 직업을 가진다면 돈을 벌지 못하여도 상관이 없다. 존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돈을 잘 버는 부자가 되라. 무슨 일을 하여 돈을 벌었든지 별로 개의치 않는다. ‘부자’가 그 사람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그 사람은 더 존경을 받게 된다. 은행가이든지, 가게 주인이든지, 차를 파는 세일즈맨이든지 관계없이 부자이면 그만이다. 100달러 짜리 돈을 세는 일이 그들의 유일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돈이 많은 부자이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 된다. 셋째로 노벨상을 받아라.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직업에 관계없이 존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아이들도 한국인 엄마로부터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으면서 자랐다. 노동자가 되든지 전문인이 되든지 성실하게 일하면 된다는 것이 나의 견해인데, 아내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힙합 가수가 되겠다는 아들에게 교수가 되라고 한다. 아직 학사학위도 끝내지 않는 아들에게 박사학위를 은근히 권유하는 아내를 보면서 한국인의 직업의식과 양반의식은 아무리 미국에서 오래 살아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내에게 장담한다.

지난 토요일 우리부부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독자들이 들었다면 청교도 문화 (손으로 하는 일은 신을 존경한다) 영향을 받은 나의 생각과 유교문화(양반은 손을 더럽혀서 일하지 않는다) 영향을 받은 아내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느낄 것이다.

컴퓨터 앞에서 한창 글쓰기에 열중하고 있던 아내에게 등산갈 시간이 되었으니 빨리 준비하라고 하였다. 몇 주일 전부터 약속되었던 하이킹 스케줄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컴퓨터 스크린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마감일 때문에 글을 써야 한다면서 몇 시간 더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실망한 나는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뒤뜰에 널려져있는 유클립터스 잎을 치우고, 잡초를 뽑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글쓰기가 끝났는지 아내는 일에 빠져 신나게 일하는 나에게 “등산 갑시다" 하고 재촉하였다. 더러운 옷을 입고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쳐다보면서 아내는 "왜 일하는 사람들을 쓰지 그래요?" 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아내는 내가 청소하는 일을 진정으로 즐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정원에서 일하는 것이 좋은데 왜 내가 좋아하는 일을 남에게 양보하라고 강요하느냐" 하고 불만을 털어놓으려는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왜 당신도 글을 쓰는 사람을 구해서 당신 대신 쓰라고 하지?" 하고 아내에게 반문하였다. 아내는 나의 질문을 한참 생각하더니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따스한 가을 햇볕 속에서 웃고있는 아내에게 나는 또 하나의 아이디어를 제의하였다. “당신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고, 나는 정원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다음에는 멕시코 남자와 멕시코 여자를 고용하여 우리 대신에 하이킹 가라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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