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듣기 싫은 말이 뭔지 아세요?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뭐하느냐’는 말이에요”
40대 초반의 한 주부가 ‘집에서 노는’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맘놓고 쉴 틈도 없는데, 일한 표시는 안나고, 남편이나 자녀들은 “놀면서 이것도 안해주느냐”며 요구가 끊이지 않고 … 내 몸은 지치는데 남의 눈에는 노는 것으로만 보이는 것, 그것이 많은 전업주부들이 호소하는 ‘억울함’이다.
“하루종일 뭐 했느냐 물으면 사실 할말이 없어요. 집안일이라는 게 맨날 똑같아서 이거다 하고 내세울게 없거든요. 아무리 해줘도 식구들은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고. 그러다 보면 내가 이집 식모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이렇게 살아야 되나 회의가 생겨요”
이 주부는 ‘내가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자주 우울증을 불러온다고 말했다. 사는 게 재미가 없고, 뭘 해봐야겠다는 의욕도 없고, 뚜렷한 원인도 없이 여기저기 몸이 쑤시는 것등이 우울증 주부들에게 보통 나타나는 증상이다.
지난해 하버드대 의과대학은 21세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요인으로 셋을 꼽았다. 심장병, 우울증, 그리고 교통사고다. 이중 심장병이나 교통사고 위험은 남자나 여자나 비슷하지만 우울증은 다르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두배가 높다. 여성중 1/4은 생애중 적어도 한번은 우울증에 걸린다고 한다. 산후 우울증, 생리전 우울증, 폐경기 우울증, 주부 우울증등 여성에게 해당되는 우울증은 이름부터 다양하다. 여성호르몬이 여성의 기분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아울러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굴레와 속박이 많은 여성의 환경, 그리고 무드에 약해지는 섬세한 감성이 여성들을 쉽게 우울하게 만든다고 한다.
지난 여름 한국에 갔을때 놀란 것은 노래방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성업중이라는 사실이었다. 무슨 유행이든 몇년 지나면 수그러드는 법인데 노래방만은 달랐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는 손님들이 있었다. 직장동료들끼리 점심식사후 잠깐 들르는 경우도 있지만 낮손님은 주로 주부들이라고 했다. 내 친구들도 그중에 속했다. 여러명 모였을때만이 아니라 둘만 돼도 노래방에 간다고 했다. 중년여자들 둘이 앉아 번갈아가며 노래부르는 모습이 상상만 해도 우습다고 했더니 “한바탕 노래하고 나면 우울한 기분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노래방은 주부들의 우울증 클리닉이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을‘마음의 감기’라고 한다. 몸의 면역성이 떨어지면 감기에 걸리고 그러다 며칠 있으면 낫듯이 사람의 마음에도 가끔씩 우울증이라는 감기가 스치고 지나간 다는 것이다. 노래하고 나면 기분이 풀리고, 슬픈 영화보며 펑펑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는 것은 감기에 대한 콩나물국, 서양식으로 하면 치킨수프라고 할 수 있다. 일시적 효과는 있지만 근본적 치료법은 아니다. ‘감기’가 오고 또 올수 있다.
A. H. 마슬로박사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에게 5단계의 욕구가 있다고 했다. 생리욕구, 안전욕구, 소속감이나 사랑에 대한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자기실현의 욕구이다. 식욕, 성욕, 수면욕 같은 생리적 욕구가 채워지고, 삶의 환경이 안전하기를 바라는 욕구가 만족되면 일단 사는 데는 불편함이 없다. 그런데 사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어떤 대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소속감을 갖고 싶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고, 더 나아가 남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으며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은
데 이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울증이 생기는 것이다. 주부들에게 우울증이 많은 것은 집안에 갇힌 환경에서는 기본적 단계 이상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감기가 한편으로 몸을 다독이는 기회가 된다면 우울증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계기가 될수 있다. 마음을 들여다 보며 사는게 허무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하겠다. 소속감의 결핍이 원인이라면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거나 클럽에 가입할 수도 있고, 능력을 인정받고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면 뭔가 새로운 걸 배울 수도 있다.
일조량이 줄어든 요즈음은 계절성 우울증까지 겹쳐 연중 가장 우울하기 쉬운 때다. 스산한 바람과 쓸쓸해진 햇살, 뒹구는 낙엽에 마음도 황량해진다. 마음의 풍경 속에 햇빛을 불러들이는 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