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징크스 깨기

2000-10-2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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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에세이

▶ 손영우 스포츠부장

커크 깁슨의 9회말 역전홈런.

10년이 넘게 지나도 생생한 통렬한 한방이었다. 투아웃 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온 깁슨이 쏘아 올린, 다저스 월드시리즈 우승의 물꼬를 트게한 그 아치는 야구의 문외한인 내게도 88년의 잊을 수 없는 기억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래서 월드시리즈를 사람들은 ‘가을의 전설’이라 부르는가.

가을의 전설 월드시리즈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다. 양키스와 메츠 두 뉴욕팀끼리 맞붙은 ‘서브웨이 시리즈’로 더욱 관심을 모은 올해 월드시리즈는 26일 밤 5차전 경기를 남겨둔 현재 이미 오래 남을 순간들을 연출해냈다. 1차전 메츠의 아쉬운 패배, 2차전 양키스 클레멘스의 메츠 피아자에 대한 창날같은 부러진 배트 투척사건, 3차전 베니 아그바야니의 통쾌한 역전 하와이언 펀치, 4차전 승리를 틀어쥐겠다는 조 토리 감독의 탁월한 용병술로 이미 올해 가을의 전설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26일 밤 경기에서 양키스가 싱겁게 우승을 확정지어버릴지, 벼랑끝 메츠의 대역전극이 시작될지 알 수 없지만 이와 상관없이 최근 수년간 양키스의 독주, 뒤집어 보면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를 만나면 주눅이 들어버리는 메이저리그 타 팀들의 ‘양키스 징크스’ 극복 여부는 2000년 가을의 가장 위대한 드라마로 남을 것이 틀림없다.


양키스에는 언제부턴가 징크스가 생겼다. 메이저리그 백년에 25번이나 우승했고, 특히 지난 5년간 97년 빼고 4번째로 우승을 노리는 무시무시한 기록 탓이기도 하지만 정규시즌에서는 그저 그렇더라도 월드시리즈에만 올라오면 난공불락의 우위를 점한다. 전력상으로는 양키스보다 나은 팀도 이상하게 몇 차례나 맥없이 무너졌으니 징크스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양키스가 월드시리즈와 같은 단기전에 강한 이유는 충분히 있다. 필요할 때 승리를 틀어쥘 수 있는 확실한 선발투수와 빈틈없는 마무리, 카리스마가 대단한 토리 감독과 단결력이 단단한 선수들 등. 그러나 포스트시즌에서 보여주는 양키스의 압도적 우위에는 선수실력이나 팀전력의 평면적 비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심리적 질곡이 있다.

양키스 징크스는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정규시즌 아메리칸리그 3위에 그쳤지만 오클랜드 A’s를 꺾고 월드시리즈에 무난히 진출했고, 메츠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전력차 이상의 우위를 보여주고 있다. 압도적 승리도 아닌 1점 간발의 차로 이미 3번이나 승리를 엮어냈다. 1차전 타드 질의 담장 라인을 맞힌 타구가 홈런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안타를 잘 치고 나갔다가 이상하게 횡사당하는 잇단 사고…메츠로서는 악운을 탓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잘 나가다가 엉뚱하고 이상한 플레이가 나오고, 정말 기이하게도 패하고 만다. 꼭 메츠가 지기로 예정돼 있거나 승리대신 패배를 선택하는 것 같다. 징크스가 생긴 것이다.

징크스가 지배하는 경기는 씁쓸하다. 만약 올해 메츠도 변변히 실력도 발휘 못하고 양키스에 월드챔피언 자리를 헌납한다면 메츠 선수들보다 야구팬들이 더 씁쓸해하고 추워질 것 같다. 팬들은 거함 양키스의 징크스가 깨지는 드라마를 고대한다.

징크스 극복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징크스다. 그러나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고, 징크스 역시 깨지지 않을 수 없다. 징크스가 깨질 때 가장 위대한 드라마는 써진다.

징크스 깨기는 그 생성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답을 찾을 수 있다. 양키스나 농구의 마이클 조던, 테니스의 잔 매켄로등 탁월한 챔피언들은 이겨야할 경기에서 꼭 이긴다. 결승점을 올려야 할 때 결승점을 올리기 위해서는 집중할 수 있어야 하고, 절대절명의 순간에 집중할 수 있기 위해서는 평소 엄청난 훈련이 바탕된 실력이 있어야 한다.

농구의 신처럼 보이는 마이클 조던이 불스에서 가장 열심히 연습하는 선수임은 유명한 이야기고, 코트의 악동 잔 매켄로는 언젠가 "세계 탑10의 실력은 거의 비슷하다. 누가 더 집중하기 위해 심줄같은 승부근성을 갖느냐에 달려있지"라고 고백한바 있다.

놀라운 집중력과 그를 가능하게 하는 엄청난 노력, 그리고 그 집중력이 빚어내는 승리. 저력과 카리스마란 그런 것이 아닐까. 실력상으로는 양키스에 버금가는 메츠가 심리적 부담을 떨치고 최선의 경기를 펼치기를 기대해 본다. 비단 야구뿐 아니라 징크스가 깨질 때 우리는 살맛이 나고 흥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메츠! 힘내라. 경기에 집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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