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나 한 구명운동은 정의 실현이다

2000-10-2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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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수학 (지나 한 구명위원회 사무총장)

‘데드 링어’라는 영화가 있다. 베티 데이비스가 주연한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쌍둥이 언니의 삶을 부러워 한 나머지 언니를 죽이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영국 설화에도 착한 쌍둥이와 나쁜 쌍둥이(Good Twin, Evil Twin)와의 싸움을 소재로 한 것이 있다. 영미인들은 쌍둥이간의 싸움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지금은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지만 서니 한과 지나 한 사건이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됐던 것도 세인의 뇌리에 각인된 쌍둥이들의 대결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쌍둥이 언니를 살해하려 했다는 이유로 기소돼 유죄평결을 받은 지나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현재 북가주 차우칠라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특이한 면모를 담고 있다. 살인미수라는 중범죄 사건이면서 피해자가 없다는 점이다. 검찰이 살인의 대상으로 지목한 언니 서니는 법정에서 동생 지나가 자신을 죽일 의도가 없다고 분명히 밝혔음에도 이는 증언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지나가 사건을 앞두고 노끈과 테입을 구입했으며 평소 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정황 증거만으로 유죄가 인정된 것이다.

지나는 모범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만큼 모진 어린 시절을 보낸 한인들은 많지 않다. 어머니가 유부남과 동거하면서 낳은 사생아로 태어난 것부터 해서 어머니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직장을 전전하는 바람에 피가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친어머니의 계모 밑에서 자랐다는 점이 그렇다. 어머니는 그 후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나 얼마 안가 깨졌으며 미국에 와 다시 결혼했으나 또 버림을 받았다. 절망에 빠진 어머니가 도박에 중독돼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생면부지의 먼 친척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자랐다. 학비를 벌기 위해 도박장 웨이트리스로 취직했다 도박에 물들어 결국은 종신형 기결수라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나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과연 친언니 살인미수라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느냐 하는 점이다. 유죄평결이 나온 당일 담당 검사까지도 놀라움을 표시했을 정도로 결과는 의외의 것이었다. 재판이 끝난 후 한 배심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배심원 중 누구도 유죄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으며 3명은 무죄를 주장한 것으로 돼 있다. 3일간의 의견 조정을 통해 마지못해 ‘평결을 위한 평결’을 내린 것으로 돼 있다. 이 배심원은 ‘지나가 무죄만 주장했더라도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나는 사건 당시 무일푼이었다. 미국에서 돈이 없는 피고에게는 관선 변호인이 선임된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관선 변호인이 사건을 맡아 승소하기는 극히 어렵다. 보수는 적고 일은 많아 사건을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재판에 나오는 게 보통이다. 이번 사건만 해도 지나는 ‘무죄가 틀림없으니 가만히만 있으라’는 변호사 말만 듣고 있다가 종신형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능력 있는 변호사만 썼더라면 검찰측이 제시한 증거로 살인미수 유죄 평결이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일부 검찰측에서도 그 정도 증거로 종신형에 처한다는 것은 과도한 징벌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을 정도다.

사건이 벌어진 어바인은 백인 일색 동네로 유색인종에 대한 눈길이 차가운 곳이다. 이번 사건을 그대로 넘어 간다면 미국에 사는 돈없고 힘없는 유색인종에게는 아무리 무거운 죄를 덮어 씌워도 상관없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얼마전 열린 한국의 날 축제 기간에 벌인 ‘지나 한 구명 서명운동’에 3,000명이 넘는 한인이 참여한 것도 이같은 취지를 이해해서일 것이다.

우리는 살인누명을 썼던 이철수씨 등이 한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결백이 입증된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피닉스, 필라델피아 한인 언론에서는 지나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토론토와 뱅쿠버에서는 기금마련을 위한 음악회와 연극이 준비 중에 있다. 우리는 앞으로 6개월 안에 항소전문 변호사를 선임해 재심을 청구할 것이다. 지나를 위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 모두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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