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생이라는 장애물 경기.

2000-10-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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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자의 세상읽기

▶ 권정희 편집위원

올해 하버드대학 졸업생중에 브룩 엘리슨이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심리학과 생물학 전공으로 학사학위를 받았지만 이 여학생의 진짜 전공은 ‘희망’이다. ‘청년에게 있어서 희망의 구성요소’라는 졸업논문을 썼고 졸업후 계획은‘희망’의 연사가 되는 것이다. “격려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가서 강연을 하고 싶다”고 졸업즈음해 그를 인터뷰한 뉴욕타임즈 기자에게 밝혔다.

21살 많지않은 나이의 여성이 ‘희망’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지난 10년, 생애 절반의 경험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7학년 개학날 학교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한후 엘리슨은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목 이하를 움직이지 못한다. 입천장에 부착된 리테이너의 키패드를 혀로 눌러 휠체어를 조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 소녀는 놀랍게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교통사고후 36시간의 의식불명에서 깨어나면서 한 첫 질문이 “언제 다시 학교에 갈수 있어요”였다. 다시 등교를 할수 있게 된후 엘리슨은 한 학년도 거르지 않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에 입학한 후 평점 A-로 졸업을 했다. 물론 그가 혼자서 할수는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같이 등교하고, 책장을 넘겨주고, 수업중 질문이 있으면 대신 손을 들어주며 딸의 팔과 다리, 분신이 되어준 덕분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수 없는 삶에서 어떻게 희망을 유지할수 있을까 - 기자가 그런 의도의 질문을 했을 때 엘리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 인생은 이런 것이다 하고 받아들이면 돼요”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면서 “인생의 기후가 항상 쾌청한 것은 아니구나”하고 처음 느끼는 것은 언제쯤일까. 소소한 좌절의 경험들은 상당히 어린 나이 때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이들면서 때로는 폭풍우 같고, 때로는 캄캄한 절벽 같기도한 어려움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굽이굽이 돌때마다 복병이 튀어나와 인생은 장애물 경기가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다. 장애물 앞에서 좌절해 주저앉으면 거기가 그 사람의 인생의 끝이 되고, 장애물을 이겨내면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리는 것 - 그것이 아마 인생의 공식이 될 것이다.

옛날에 어느 왕이 커다란 바위를 길 한가운데에 갖다놓고 길옆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몇몇 부자 상인들과 귀족들은 아무 말없이 그냥 바위를 돌아서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은 왕이 통치를 제대로 못하니 길도 이 모양이라며 불평을 했다. 그러나 아무도 바위를 치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때 채소를 한짐 짊어진 한 농부가 나타났다. 농부는 바위를 보자 짐을 한쪽에 내려놓고 바위를 밀기 시작했다. 한참 땀을 흘리며 애를 쓴 끝에 농부는 바위를 길옆으로 치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서 농부가 짐을 지고 떠나려다 보니 바위 있던 자리에 돈주머니가 놓여있었다. 주머니 속에는 ‘바위를 치운 사람의 몫’이라는 왕의 쪽지와 함께 금화가 잔뜩 들어있었다. 농부는 다른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진리를 알게 되었다. 모든 장애물 뒤에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지난 한주는 어디를 가나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화제가 되었다. 노벨상 수상을 보는 시각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DJ가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낼 엄청난 역경을 이겨내더니 결국 영광을 본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의 옆에서, 때로는 당사자 보다 더 깊은 시련을 겪어내야 했을 이희호여사가 한 회고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정치하는 사람이라 그 일생에 굴곡이 있을 줄은 짐작했지만, 그렇게도 많고 많은 험난한 고개를 가쁜 숨 몰아쉬며 넘나들 줄은 미처 몰랐었다”
‘신혼 9일만에 남편이 옥중생활’을 하면서 시작된 좌절과 절망, 고통의 세월들을 이여사는 신앙의 힘으로 견뎌냈다고 회고했다. 신앙이 약속하는 것은 희망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깨달아지는 것은 “사람이 온전하게 평생을 살기도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삶의 이 모퉁이, 저 모퉁이에서 복병들을 만나 상하고 망가진 사람들을 주변에서 본다. 인생을 ‘상황’으로 본다면 다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다. 삶에 대한 ‘자세’로 본다면 이겨내지 못할 상황이 별로 없다. 분명히 아득한 절벽이었는데 지나고 보면 기적처럼 길이 있는 것을 우리는 세상의 용기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본다. 희망이라는 보물을 가진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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