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통령과 국민의 존경

2000-10-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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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에세이

▶ 이강규<국제부 해설위원>

한국의 경제가 어렵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서울을 방문하고 며칠 전에 돌아온 샌프란시스코의 한 후배와, 지난 주말 전화통화를 한 한국의 가족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제2의 경제대란’을 입에 올렸다. 현지의 분위기가 기분 나쁘게 뒤숭숭하다는 것이다.

백화점 직원인 여동생은 "고가수입품을 취급하는 일부 점포들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매장들이 파리를 날리고 있다"며 "최근 들어 김대중 대통령에게 막말을 하는 상인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DJ의 노벨 평화상 수상소식이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모조리 도배했던 지난 주말에도 "이제는 대통령이 경제문제에 신경을 써주기 바란다"는 시민들의 간청이 호들갑스런 ‘감축’ 일색의 지면 구석구석에 비수처럼 꽂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미 일반상식에 속하는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무슨 일이건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추진력을 얻는다. 이렇듯 유일무이한 힘의 실체인 대통령이 경제 살리기 ‘염불’을 밀어둔 채 노벨상이라는 ‘잿밥’에 한눈을 판 탓에 가뜩이나 취약한 경제가 더욱 어렵게 꼬였다는 게 DJ를 원망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상황인식인 것 같다.


경제가 벼랑 끝으로 몰린 것이 대통령 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우기는 것은 보편적 상식으로 볼 때 억지에 가깝지만 한국에서는 이미 ‘검증된 사실’에 속한다. 미국의 대통령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나라살림을 거덜내기도 하고, 망가진 경제를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참으로 엄청난 힘이요, 능력이다.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장기호황의 경제적 여유를 즐기고 있는 미국은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다. 11월7일이면 ‘지퍼게이트’의 주인공 빌 클린턴을 대체할 백악관의 새로운 임자가 가려진다. 2000년대 첫 대통령 후보는 ‘인터넷 발명가’를 자처하는 민주당의 앨 고어와 영어가 서툰 공화당의 조지 W. 부시다. 조금 무리하게 희화화한다면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말을 바꾸거나 사실을 은근슬쩍 뒤틀기 잘하는 고어는 과장벽 환자고 발음이나 철자가 비슷하면 뜻도 대충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부시는 영어환자(English patient)다.

고어와 부시를 바라보는 한인들의 시각을 자세히 관찰할 기회는 없었지만 오래전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이웃으로 지냈던 연고로 지금도 가끔씩 얼굴을 마주하는 ‘동네친구’로부터 이들에 대한 농담 섞인 촌평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부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말실수가 잦은 그를 보면 "대한민국을 깨끗이 말아먹은" 어느 전직 대통령이 떠올라 영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의 부친인 조지 부시가 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 4.29폭동으로 모질게 당한 기억이 남아 있어 더욱 기분이 찜찜하다고 했다. 이 양반은 고어도 탐탁지 않아 했다. "얼굴도 희멀거니 잘 생겼고 말도 뺀질뺀질하게 잘하지만 사실을 왜곡하는 버릇이 한국의 정치인을 빼박은 것 같아 표를 주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물론 우스갯소리였지만 고어나 부시가 들었으면 그야말로 펄쩍 뛸 일이다. 단지 말실수를 잘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경제를 거덜낼 대통령감으로 낙인찍히고, 아버지 대에 발생한 폭동 때문에 ‘연좌제’의 멍에까지 둘러쓴 부시는 말할 것도 없고, 몇마디 사실왜곡으로 "막가는 정치인"으로 폄하된 고어 역시 이빨을 갈아부칠 정도로 분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기분 나빠해야 할 장본인은 이들이 아니라 비교의 기준이 된 한국의 정치인들이다. 물론 그중에는 ‘노벨상 환자’의 의심을 받았던 대통령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힘있는 정치인들의 경우 무죄 입증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당사자들의 몫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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