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코메리칸, 그는 누구인가?

2000-09-0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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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시민과 한국민족의 개념

▶ 손호철(서강대 교수. 현 UCLA 교환교수)

90년대 재일동포 커뮤니티에서는 ‘시민-민족’ 논쟁이라는 논쟁이 뜨겁게 벌어진 바 있다. 일부 지식인들은 재일동포도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일본인 이상 일본에 거주하는 ‘시민’으로서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권리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조선 내지 한민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주장을 편 것이다.

분명히 재일동포와 미주동포는 역사성이나 현실적인 여건 등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국에서 살아감으로써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일정한 공통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미주 한인 커뮤니티의 경우도 코메리칸을 구성하는 두 부분, 즉 코리안과 아메리칸 중 어디에 강조점을 두느냐는 문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중 코리안에 강조점을 주는 입장이 바로 재일동포 논쟁에서의 ‘민족론’이라면 아메리칸을 강조하는 입장이 ‘시민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문제는 개개인의 사정에 따라 일정하게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재일동포와 달리 그 역사성에서 자발적 이민에 기초한 코메리칸의 경우 아메리칸, 즉 미국시민적 측면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특별한 개인적 사유가 있지 않는 한, 영주권자들은 미국시민권을 획득하고 미국시민으로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한국의 시민권을 유지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를 갖지 않으면서도 단지 한민족이라는 긍지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시민권을 획득하지 않고 영주권자로 남아 있는 것은 스스로 정치적 무국적자를 자초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시민권을 획득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단 시민권을 획득하더라도 정치적 판단에 있어서 무엇을 주요한 준거틀로 하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보다 구체적으로 선거에서 민주당을 지지할 것인가, 공화당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이에 대해 하나의 입장은 특정 정당이 소수민족 일반, 특히 한인 커뮤니티에 어떠한 정책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당의 집권이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신장에 도움을 줄 것인가를 판단기준으로 하는 입장이다. 이와 달리 다른 하나의 입장은 조국인 한국을 기준으로 특정 정당의 대한 정책이 어떠한가, 특정 정당이 집권하면 한반도 문제가 어찌 될 것인가를 판단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앞의 입장이 코메리칸의 두 측면 중 미국시민적 측면을 강조하는 ‘시민론’적 입장이라면, 뒤의 입장은 두 측면중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측면을 강조하는 ‘민족론’적 입장이다.

물론 현실적 판단은 소수민족 정책과 대한 정책이라는 두 측면의 종합적인 판단에 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중 역시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소수민족 정책과 관련된 ‘시민적’ 측면이다. 이같은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그간의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 참여, 특히 이민 1세대를 중심으로 한 정치참여는 지나치게 시민적 측면보다는 민족적 측면, 그것도 냉전논리에 기초한 민족적 측면이 강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사실 과거 커뮤니티의 일부 지도급 인사들의 경우 특정 정당이 상당히 소수민족에 대해 불리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한 정책이 냉전적 논리에 기초한 강경론적이고 군사주의적인 입장에 있다는 이유로, 또 이 같은 입장에 기초해 한국의 군사정권들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이 정당을 지지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제 이같은 관행이 남아 있다면 이를 바꿔야 한다. 물론 조국인 한국은 중요하다. 따라서 특정 정당의 대한 정책은 중요한 정치적 판단기준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코메리칸의 정치적 판단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역시 소수민족으로서의 코메리칸의 정치, 경제, 사회적 권리의 확대이다. 그리고 올바른 대한 정책 역시 이 같은 시민적 권리가 확 대될 때 이를 매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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