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북한동포들의 상황 바뀐것 없다

2000-09-0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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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기행후 만난 탈북자들

▶ 박명귀<정토회 총무>

맑은 마음, 좋은 벗, 깨끗한 땅을 이루기 위해 일하는 정토회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마련하는 우리 민족의 뿌리찾기 여행을 위해 LA를 떠난 것은 지난 8월4일이다. 10일 동안 옛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 그리고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찾는 역사기행이었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역사기행은 금년이 7번째로 103명의 참가자중 LA 한인은 18명이었다.

심양을 시작으로 광개토왕비등 유적을 둘러본 일행은 아직은 관광객의 발길이 붐비지 않는 서쪽 코스로 백두산 정상에 올랐다. 일년중 맑은 날이 며칠 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걱정 속에 정상에 올랐지만 천지는 안개 한점 끼지 않은 맑은 모습이었다. 작은 비석이 중국과 북한의 경계여서 우리는 한발을 북쪽 땅에 딛고 사진을 찍다 중국군인의 눈을 피해 조금씩 북한 땅으로 넘어가 사진들을 찍기도 했다. 땅엔 경계표시도 다른 흔적도 없었지만 경계석 너머가 북한 땅이라는 설명에 모두가 잠시라도 발을 딛고서 감회를 맛보고 싶어했다. 바로 우리 발아래는 텐트를 치고 보초를 서는 북한군인들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차를 멈추고 강건너 북한의 무산시를 건너다보았다. 골목길에 걸어다니는 사람들과 극장처럼 보이는 건물에 붙어 있는 포스터까지 알아볼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일행 중에는 실향민도 여럿 있었는데 그들의 가슴속엔 소리없는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우중충하고 낡은 건물들 사이로 밥을 짓는지 연기가 올라왔지만 대부분의 건물들과 골목길은 정적에 싸여 있었다. 주변 산들은 마치 누더기처럼 파헤쳐지고 아침 일찍부터 하릴없이 강변에 나온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다. 나에게는 이산가족도 아픔도 없지만 저기에 굶어 죽어가고 있는 나와 핏줄을 나눈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가슴에 아픔이 되어 오는데,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우리 일행은 역사기행을 끝내고 연길에서 탈북자를 돕는 이들의 도움으로 몇 사람의 탈북자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탈북자를 돕는 일은 불법이어서 돕는 이들도 함께 모여 지내지 못하고 마치 간첩 접선하듯 만나고 자주 거주지를 옮겨야 한다고 했다. 남북 정상회담 직전 북한측 요구로 탈북자 색출작업이 있어서 거의 모든 탈북자가 잡혀서 돌아갔는데 최근에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굶어죽으나 잡혀서 맞아죽으나 한가지라며 건너오는 사람들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만난 34세된 탈북자는 아오지에서 15일 전에 연길에 온 심한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이었다. 병든 형과 조카들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왔다는 그 남자의 부모 고향은 남쪽이고 친척들도 남에 있다지만 그는 자기들은 남쪽 친척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남북정상회담 소식도 듣고 이산가족 상봉도 있을 것이라는 소식도 들었지만 그것은 특권층만의 얘기일 뿐 자기네 같은 성분이 나쁜 사람들에겐 상관없는 일이라는 설명이었다. 아오지에는 아직도 전쟁포로와 납북자들이 살아 있고 제일 형편이 나쁘다고 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여 정상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을 보며 그 뒤에서 지금도 굶주림에 지쳐 모든 희망을 잃은 더 많은 불쌍한 이들을 잊는 건 아닌지... 이제 모든게 다 해결된 것처럼 생각하고 지금도 죽음을 어깨에 메고 압록강을, 두만강을 건너야 하는 사람들을 잊는 건 아닌지. 추운 겨울 얼어붙은 압록강을 인신매매단에 끌려오며 걸린 동상으로 두 다리와 손가락을 잘리고 버림받은 소녀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지...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돈화역에서 기차를 타고 심양으로 향했다.

심양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오후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서울에 온 북한의 이산가족, 남에서 평양으로 간 이산가족의 만남으로 벅찬 기쁨과 회한의 눈물이 신문의 지면과 TV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영양실조 걸린 남자와 다리가 없어도 잘 먹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웃다, 울며 우리를 배웅하던 소녀가 다시금 생각나 우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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