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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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을 신청하는 이유

2000-09-0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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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칼럼

▶ 남진식<사이프러스>

내일 오전 일찍 미국시민권 면접시험이 있어 오늘밤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다. 잠을 청해도 온갖 상념들이 마치 물결이 모래를 할퀴고 거품되어가듯 내가슴 속을 치고 또 적신다.

왜 그럴까? 예상질문 100문제는 이미 확실히 외워두고 있고 신상명세서는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지난 20여년간 세금도 에누리없이 내었겠다, 그 위에 한미연합회에서 통역마저 붙여주니 가는귀가 조금은 멀어도 걱정될게 없다.
내일 시험관은 “만약 당신이 미국시민이 되어 당신의 조국과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을 위해 싸울 수 있겠느냐”고 물을 테고 나는 서슴없이 “예스”라고 대답해야 하겠지. 나는 틀림없이 합격할 테고 시민선서를 거쳐 미국시민이 되는 게다. 시민선서는 분명 미국과 나와의 계약이고 나는 미국 속의 한국계 시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선량하게 살아가야만 한다.

사실 나는 미국에 사는 것이 좋다. 실용주의가 조금 동물적이어서 늙은 침팬지가 무리에서 밀려나듯 노인들이 자식들로부터 소외되어 허무를 씹는 아픔이 있어도 문명의 이기가 극대화되어 있고 일반시민이 먹는 음식과 건강, 그리고 환경보호에 적극적인 정치가 있어 좋고 대통령도 토크쇼에 오르내리는 보통인이라는 미국의 상식이 합리적이어서 좋다. 혐오범죄가 조금 염려되어도 견제와 균형이 역동적으로 작용하여 조화를 이룩하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좋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 오랫동안 살아오면서도 시민권 취득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우선 시민권을 서둘러 취득해야 할 사연이 없었고, 그리고 고향에의 그리움이 남아 있고, 또 한국인의 긍지 때문에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은퇴하고 난 뒤에야 아이들도 성인이 되어 잘 살아가고 있고, 연금도 매월 나오고 해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내 고향에서 채소밭 가꾸고 낚시질하는 청빈거사가 되어 유유자적하다가 선영 아래 묻히는 소박한 꿈을 가슴속에 숨기고 지난해 5월 한국을 방문했었다.

한국은 엄청나게 변해 있었고 듣던 대로 타락해 있었다. 도시의 시멘트 문명에 지쳐 있는데 내 고향마을도 온통 콘크리트로 덮여 있고 정서가 없다. 노을지는 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도 없고 마당에 뛰노는 강아지도 없다. 밤하늘은 예같이 푸르고 깊어 별들은 총총히 빛나도 자규의 울음소리도 없다. 내 고향은 이게 아니었는데….

나는 미국에 돌아와서야 마음을 정리하고, 이미 내 자식들도 내 손자도 미국시민이 되어 있고 하여 나도 소속을 분명히 해 투표권을 행사하는 의미 있는 미국생활을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지난해 8월에 시민권을 신청했다.
정녕 나는 미국시민이 되는 건가? 이민 1세로서 미국 땅에 묻혀 후일 내 자손들이 번성하여 일년에 한번쯤 나의 무덤에 모여 전설처럼 살아온 조상들을 기억하고 뿌리를 확인하는 것도 유산이 되리라고 마음을 달래본다.

그러나 내가 어릴 적 여름날 모깃불 피워둔 마당 멍석 위에 팔베개하여 누워 쳐다보던 푸르디푸른 하늘에 휘황한 달을 마음속에서 다시 본다. 어머니는 곁에서 삼을 가르시고 나는 저 밝은 달 속에 초가삼간 지어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하였는데…. 돌아가신 부모님께 죄스럽고, 조상들과 단절되는 아픔이 상흔이 되어 남는다.

그렇다. 나는 결코 모국을 저버리는 게 아니고 다만 삶의 길을 택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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