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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 연휴의 이형택 돌풍

2000-09-0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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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칼럼

▶ 박덕만 편집위원

"마음씨 착한 소녀가 못된 계모의 학대에 시달리다가 요정의 도움으로 잘생긴 왕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게된다"는 내용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널리 사랑을 받아온 동화다. 정확한 탄생연대는 불명이지만 유럽에서 처음 등장한뒤 전세계로 번졌으며 9세기경에는 중국말로 번역된 기록이 있다. 이를 번안한 스토리도 500개가 넘으며 영화로 각색돼 히트를 친 것도 여럿이다.

프로이드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뻔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이유를 인간심리의 기본적 특질인 ‘공포’와 ‘희망’을 담고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느낀 공포감을 신데렐라의 계모에 대한 공포감에 대비해 희석시키고 신데렐라의 해피엔딩을 통해 자신의 희망을 대리충족시킨다는 것이다.

스포츠계에서는 무명의 선수나 약체의 팀이 예기치 않았던 돌풍을 일으킬때 이를 신데렐라에 비유한다. 강자의 독주에 식상한 팬들이 이변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지난 노동절 연휴 US오픈 테니스 16강전에서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세계 최강의 선수 피트 샘프라스와 당당하게 맞서 싸웠던 무명의 한국선수 이형택의 이야기도 우리 한인들 뿐만 아니라 미국 스포츠팬들의 관심을 끌었던 또 하나의 신데렐라 스토리였다.


사실, 기자도 불과 열흘전까지는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지난달 29일자 본보 스포츠 섹션에 ‘한국남자 최초로 US오픈 테니스 2라운드 진출’이라는 타이틀로 보도됐을 때 그의 이름을 처음 접했다. 그러나 정작 기사본문에는 1라운드에서 안드레 애거시에게 3대0으로 패한 미주한인선수 알렉스 김에 관한 것 뿐, 이형택에 관한 언급은 없었기 때문에 ‘어쩌다 운이 좋아 1라운드에서 이긴 한국에서 온 선수인가보다’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갔다. 당연히 다음날인 30일에는 그의 풀네임을 잊어버렸고 성씨가 이씨였다는 정도만 기억했을 뿐이다.

그렇게 잊고 있다가 1일자 신문을 받아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과히 세련되지 못한 - 자신의 표현대로 ‘강원도 촌놈’같은 -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스포츠 섹션 1면에 실려 있었다. 2라운드서 세계랭킹 13위선수를 격파했다는 소식과 함께. 노동절 연휴를 집에서 쉬는동안 그가 3라운드를 통과하고 세계 최강의 테니스선수인 피트 샘프라스와 맞붙게 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ESPN과 CBS등 미국TV들이 앞다투어 그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방영했다.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난 ‘촌놈’으로 식당에서 일하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한 이형택은 대회 7주전 미국에 온뒤 뉴욕주 빙햄턴에서 열린 토너먼트에서 같은 한국선수에게 패해 US오픈 출전 자격 획득에 실패하자 밤을 새워 버스를 타고 뉴욕으로 가서 퀄리파잉 토너먼트에 도전했다. 퀄리파잉대회에서는 3라운드에 탈락했으나 본선출전 기권자가 생기는 바람에 행운의 출전권을 잡은 후 3연승을 거두며 샘프라스와 격돌하게 됐다는 점에서 매스컴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신데렐라 요소를 고루 갖추었던 셈이다.

평소 테니스경기 중계는 즐기지 않는 편이지만 샘프라스와 결전이 벌어진 4일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TV앞에 앉았다. 첫세트에서 타이브레이크까지 갈정도로 대등한 접전을 벌이는 그의 모습은 기대 이상이었다. 샘프라스가 오히려 만만한 상대를 손쉽게 처리 못하는데서 초조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샘프라스의 기량은 그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 그가 골리앗에 맞서 싸우는 다윗처럼 세계 최강의 선수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는 사실은 대견하기는 했지만 이형택의 서브를 ‘급행열차’에 비유한다면 샘프라스의 서브는 ‘초특급’이었다.

비록 8강문턱에서 좌절하기는 했지만 그가 이번에 이룬 업적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이형택의 US오픈테니스 16강진출은 황영조의 마라톤 제패, 박세리의 US여자오픈 골프대회 우승,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입성등에 이어 한국스포츠 사상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됐음이 틀림없다. 이형택은 한수위인 샘프라스 앞에서 전혀 주눅들지 않은 플레이로 지켜보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물론 그가 샘프라스를 격파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처음부터 그가 승리하리라고 믿지는 않았으니까.

5일자 뉴욕타임스 기사는 경기에서 이긴 샘프라스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이 대부분의 지면을 이형택에게 할애했다. 기사를 쓴 셀리나 로버츠라는 여기자는 이형택의 움직임이 ‘전광석화’와 같았다고 표현했으며 1세트 타이 브레이크에서 미처 멈추지 못한 그의 발이 네트에 닿음으로써 허용한 세트 포인트가 그의 투지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신데렐라 스토리의 중단’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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